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백악관을 취재하는 출입기자들은 매년 4월 마지막 토요일 만찬을 갖는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 명기된 ‘표현의 자유’ 중요성을 되새기고 기념하는 유서 깊은 행사로, 1924년 제30대 존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처음 참석한 이후 대통령 및 정부 핵심 관료들이 언론인들과 친목을 다지는 연례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은 모든 회의나 행사에서 진지한 발언을 하지만, 이 모임에서만큼은 개그맨처럼 재미난 얘기로 웃음을 자아내야 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다.
1991년 만찬 때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오기 전 동네 슈퍼마켓에서 산 지라시 신문을 읽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해 아쉽다”면서 “그래도 제겐 뉴욕타임스(NYT)가 있다”고 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NYT를 지라시 신문에 슬쩍 비유한 것이다. 2014년 만찬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한 것은 미친 짓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며 “하긴 요즘은 아무나 그 상을 받는다”고 했다. 크림반도를 집어삼킨 푸틴이 이 상에 추천된 것을 비판하며 자신도 별 기여 없이 받았다는 점을 자학 개그 풍으로 표현한 것이다. 2024년 만찬 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을 “6살짜리와 경쟁하는 어른”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꼬며 재대결 의욕을 보였지만, TV토론 역풍으로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때는 물론 2025년 백악관 재입성 후에도 출입기자단 만찬을 외면했다. NYT 등 주요 신문을 “망해가는 신문”이라고 조롱하면서 폭스뉴스 등 마가(MAGA) 성향의 매체를 편애했다. 그런데 최근 정통 언론(레거시 미디어)과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 만찬엔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참석했는데 총격 사건으로 행사가 시작된 직후 중단되자 SNS에 “쇼는 계속돼야 한다”는 글을 올리며 행사에 애착을 보였다. ‘30일 내 다시 개최하겠다’고도 했다. 백악관 브리핑 땐 취재진을 향해 “여러분들이 책임감 있는 자세로 보도를 잘했다”고 격려했다. 평생 언론을 비난하고 무시했던 트럼프가 팔순을 앞두고 철이 들어 정통 언론의 중요성을 자각한 것일까? 임기를 2년 반 이상 남겨둔 그가 비로소 언론의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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