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전 서울대 교수
일상 대화 속 자주 쓰는 ‘있다’
존재를 뜻하는 사용법에 매료
단순한 언어적인 특질을 떠나
인연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여러 존재가 그저 있는 게 아닌
깊은 관계로 묶여 있음 일깨워
한국어로 글을 쓸 때마다 모어인 영어와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두 언어 사이의 문자와 문화 차이는 늘 새롭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던 흥미로운 차이를 최근 발견했다. ‘있다’와 ‘없다’의 간결함이 그것이다.
있다와 없다는 영어로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존재’다. ‘there is’로 표현한다. 두 번째는 ‘장소’다. ‘to be (somewhere)’로 표현한다. 세 번째는 ‘소유’다. 주로 ‘to have’로 표현한다. 그 밖에 있다는 동사의 진행형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없다는 있다의 부정이지만, 영어에서 부정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정의 기능어인 ‘no’ 또는 ‘not’을 붙여 표현한다. 또한, 주어·동사를 일치시키기 때문에 동사가 주어에 맞게 변한다. 한국어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영어만 그런 건 아니다. 유럽의 언어들도 간결하지 않다. 프랑스어에서 존재를 뜻하는 있다는 ‘il y a’(일야), 부정은 ‘il n ’y a pas de’(일냐 파 드)로 표현한다. 독일어는 ‘es gibt’(에스 깁트 )와 ‘es gibt kein’(에스 깁트 카인)이다. 이때 ‘kein’(카인)은 부정 한정사로, 수식하는 명사의 성·수·격에 일치해야 한다. 영어보다 더 복잡하다. 스페인어는 비교적 간단하게 ‘hay’(아이)와 ‘no hay’(노 아이)다. 주어·동사 일치나 명사의 성과 수의 일치도 없다. 이 언어들의 장소와 소유 표현은 조금 더 간단하긴 하지만 영어와 비슷한 정도다.
한국어와 언어적으로 가깝게 여겨지는 일본어와의 비교도 흥미롭다. 일본어는 존재의 의미로 ‘いる’(이루)와 ‘ある’(아루) 두 단어를 쓰고, 유정과 무정의 존재를 구별한다. 부정의 경우 유정일 때는 ‘いない’(이나이), 무정일 때는 ‘ない’(나이)를 사용한다. 장소와 소유는 다른 표현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의미의 범위가 한국어의 있다와 없다보다 좁다.
한국어의 있다와 없다에 대한 관심은 점차 두 단어의 간결함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다른 언어에 비해 간결하다는 것은 곧 의미에 초점을 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른 언어들의 표현은 상대적으로 더 길다. 그래서 명확한 단어보다 문법적 표현으로 느껴져 표현력이 약해 보인다. 한국어의 있다와 없다는 뜻이 명확한 독립된 단어로, 훨씬 그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1993년 베스트셀러였던 ‘일본은 없다’라는 책 제목도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신문 기사 제목은 물론, 일상 대화 속에서도 있다와 없다는 자주 등장한다. 두 단어의 의미 전달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일상 대화에서 흥미를 느낀 부분은 더 있다. 존재를 뜻하는 있다의 독특한 사용법이다. 일반적으로는 무엇이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말하는 사람과의 관련성에 대한 질문의 의미도 포함되곤 한다. 한국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종종 무엇이 있다는 말에 대해 “있으면 어때?”라는 반응이 나올 때가 있다. 또는 그 존재와의 관계를 바로 되묻는 “무슨 상관이지?”라는 반응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어에서 그런 반응은 거의 볼 수 없다. 존재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련성을 묻기 위해서는 화제를 바꾼 뒤에야 관련성에 대한 대화가 이어진다.
존재를 뜻하는 있다 속에 관련성을 바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적 특질이 아니라 세계관에 가깝다. 즉, ‘무엇이 있다’는 설명은 사실 전달로 끝나지 않고 그 존재가 나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염두에 둘 때 발언의 의미가 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어디선가 서로 관련이 있다. 따로 존재하기 어렵다. 이를 두고 인연이라는 개념과 연결짓는다면 자칫 낭만주의적 오리엔탈리즘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어디에선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바가 있다. 특히 ‘다양성’이라는 키워드가 나올 때마다 느낀다. 영어에서 다양성은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정작 다양성을 이루는 여러 요소의 관계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사는 프로비던스 지역의 인구 구성은 다양하다. 지역 정치인들마다 그 다양성을 홍보하지만, 그 다양한 인구 구성원들끼리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일반 시민들 역시 다양성에 대해 자부심을 피력하지만, 개인과 공동체에 다양성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2000년대 초, 일본 교토에 살 때부터 걷기는 취미였다. 나중에 서울에 살면서 더 자주 걸었고 지방 도시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닐 때에도 즐겁게 걸었다. 도시를 걸으면 느끼는 바가 많고 거리와 골목마다 공존하는 여러 시대의 흔적과 동시대 산물을 보는 일도 흥미롭다. 처음엔 오래된 동네를 주로 걸었지만, 지금은 어디든 걷는 재미를 느낀다.
어느 도시, 어느 거리에서나 걸으면서 ‘있다’의 세계관을 떠올린다. 여러 존재의 관련성을 발견할 때마다 지적 자극을 받는다. 복잡한 도시 풍경의 여러 존재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도시 전체의 생태를 깊이 바라보게 해준다. 자연 역시 그러하다. 그런 나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나의 세계관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 한국어가 매우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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