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전 병무청장, 전 해양대 교수
우리나라의 에너지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지난 4일 밤에 ‘피격’된 3만8000t급 벌크선 나무호가 8일 0시20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항으로 예인됐으나, 국민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정부는 특사 파견을 통한 이란 측의 유화적 메시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지만, 이번 사태는 국제정치가 상대의 ‘입’이 아닌 냉혹한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켰다. 실체 없는 ‘선의’라는 환상에서 깨어나 냉정한 국익 좌표를 재설정할 때다.
정부가 이란 외교부의 말을 마치 확고한 안전보장이 확보된 것처럼 국민에게 알린 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이란의 이원적 권력구조를 간과한 탓이다. 실질적 무력을 쥔 혁명수비대(IRGC)의 전략적 도발은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상수(常數)였다. 그런데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나무호 사태에 대해 ‘피격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물론 정확한 손상 원인을 규명한다지만, 정부가 낙관론에 빠져 국민의 눈을 가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호르무즈에서 우리의 국익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할 골든타임은 지금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상 운송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바닷길은 곧 경제의 동맥이다. 따라서 국제해협에서 선박의 자유로운 통항을 보장하는 ‘통과통항권’(Transit Passage)이라는 국제질서가 물리적 위협으로 무너지는 것을 절대로 좌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전 세계 해양 질서에 ‘독소적 선례’를 남기게 된다. 여기서 밀린다면 유사한 형태의 해상 봉쇄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등 우리의 핵심 항로에서도 도미노처럼 재현될 것이다. 최근 동남아의 한 국가에서 믈라카(옛 ‘말라카’) 해협에 대한 통행료 부과를 언급한 사례에서 보듯, 해양 질서에 대한 도전은 더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이 ‘프로젝트 프리덤’을 중단한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 측 참여를 검토하지 않겠다는 안보실 발표는 전략적 깊이가 얕은 자충수가 될 뿐이다. 물론 해양자유구상 참여 여부는 나무호 사태 원인 조사 결과에 따라 결정한다지만, 이는 항행의 자유를 위해 항모전투단을 전개하는 프랑스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과도 극명히 대비된다. 이제는 ‘다국적군’(가칭) 참여를 통해 국제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동맹과의 결속을 다져야 한다. 해역 내 감시 및 호송 작전을 하면서, 도발 포착 시 즉각적인 물리적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실체적인 억제력을 행사하면서 규범 준수 시에는 인도적·경제적 협력의 창구를 열어두는 정교한 출구전략도 병행해야 한다.
바닷길은 절대 공짜로 열리지 않는다. 이란의 유화적 선의가 우리 선원의 생명을 담보하지 못하며, 정부의 안일한 판단은 동맹의 근간을 위협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유약한 낙관론이 아니라, 해양 질서를 지키기 위해 국제사회와 어깨를 맞대는 ‘행동하는 연대의 지혜’다. 강력한 억제력만이 이란과의 관계를 ‘상호 존중’ 궤도로 되돌려 놓는 실질적인 시작점이 될 것이다. 정부는 이제 국민 보호와 국제법 수호라는 엄중한 사명을 위해 흔들림 없는 원칙과 유연한 전략이 결합된 길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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