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5월 13일 동아일보에는 조선 사회운동 단체 연합장으로 치러진 김사국 선생의 영결식 기사가 실렸다. 조선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영면 소식은 그보다 며칠 앞서 전해졌다.
“김사국 씨는 수년 전부터 폐병에 걸려 신음해 오다가 그제 8일 오후 5시에 경성 가회동 177번지 북악청년회관 안에서 마침내 34세의 파란중첩(波瀾重疊)한 일생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갔다. 경성 각 사회단체에서는 그 장의(葬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협의한 결과 장의는 사회 운동 단체 연합장으로 하게 됐다. 정우회(正友會), 전진회(前進會), 조선노동당, 청년총동맹, 형평사(衡平社) 본사 외 40여 단체가 연합하여 호상부, 회계부, 설비부 각 부로 나누어 가지고 지금 그 준비에 분망 중이다. 발인은 오는 12일 오전 8시요, 영결식은 동일 오전 10시 훈련원(현재 을지로 훈련원 공원)에서 거행하리라는데.(하략)”
이어 기사는 김 선생의 약력을 소개한다. “1892년 11월 9일 충남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10세 때 부친을 잃고 편모시하(偏母侍下)에서 생도(生道)가 막연하고 그 외 사정에 의하여 김 군의 친제(親弟) 사민 군과 모친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갔다. 형편이 어려워 김 군은 수학(修學)할 기회가 없었으나,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그 후 경성에 올라와 보성학교에서 수업하다가 중도에 퇴학하였다. 1910년 일한합병(日韓合倂)이 됨에 불평을 품고 만주와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로 표랑(漂浪)하며 동지(同志)의 결속에 노력하였다. 국민대회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 서대문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1920년에 출감하였다.(중략) 1923년 봄에 자유노동조합 사건으로 해삼위(海參威·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다음 해 1월에 다시 조선에 잠입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간도에서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운동자의 양성에 노력했다. 그러다 노령(露領·러시아)을 거쳐 만주 영고탑에 가서 동양학원의 후신인 대동학원을 설립했으나 중국 관헌에게 해산을 당하고, 또다시 노령으로 가서 조선 사회 운동의 통일을 위하여 힘썼다. 1924년 6월에 폐병이 걸린 몸을 끌고 귀국하여 신음하면서도 한결같이 사회 운동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금년 5월 8일 오후 5시에 영면하였다.”
5월 13일에 열린 그의 영결식(永訣式) 모습은 이러했다.
“영결식은 예정하였던 시각보다 좀 늦어 10시 20분에 조악(弔樂)으로써 개식을 한 후에 조가(弔歌)는 경찰이 금지를 하였고, 11시 40분에 조악으로 폐식을 하였다. 식장은 흐린 하늘과 한가지로 극히 비수(悲愁)에 잠겼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 영구차는 다시 동지들의 어깨에 끌려 조기(弔旗)와 조객(弔客)을 앞뒤에 세우고 수철리(현재 금호동) 공동묘지로 향하였더라.”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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