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섭 한국국가전략학회 회장, 전 국방대 부총장
국제질서의 규범이 해체되고 자국 우선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지정학적 대전환기’가 도래했다. 하지만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가 돼야 할 외교·안보 정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180도 뒤집히는 진영 대립의 포로가 됐고, 그사이 대한민국호(號)는 방향타를 잃고 거친 파도에 직면했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핵보유국 완성’이라는 국가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과거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민족 공조와 햇볕정책의 선의를 활용하면서도 핵 개발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최근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핵보유국 지위를 명문화하고,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통일 개념마저 삭제했다. 이는 한국을 더는 통일의 동반자가 아닌 제거 또는 복속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전략적 노선 변화다.
그간 우리 사회 일부 진영은 북한의 ‘반미 자주통일’ 노선을 비판 없이 수용하며 안보의 근간을 흔들어 왔다. 그러나 북한이 ‘두 국가론’을 공식화하자 이들은 존재론적 모순에 직면했다. 북한은 이제 남한을 ‘대한민국’이라며 한민족의 유대를 끊고 독립국가이자 핵 강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각인하려 한다.
정치권의 외교·안보 기조 역시 우려스럽다. 대화 재개에만 매몰돼 북한 눈치를 살피며 대북방송 중단, 무인기 자제, 두 국가론 수용 등 원칙 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북한의 반응은 냉담하다. 핵보유국을 자처하는 북한은 미국·러시아·중국 등 핵 강대국과의 직접 대화만 선호하며 한국을 배제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노골화한다.
특히 북한은, 1974·1998년 핵실험 후 2005년 미국으로부터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은 인도의 선례를 원용하려 한다. 만약 미·이란 전쟁 이후 미·북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를 계기로 핵 군축 협상에 나서고, 반미 노선까지 철회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하고 한미동맹의 근간이 흔들린다면 우리의 안보 지형은 궤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국가 정체성의 혼란도 임계점에 이르렀다. 한미 정보 공유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안보 핵심 기밀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은 핵 개발 성공 이후에도 주변국의 핵 도미노를 막기 위해 ‘전략적 모호성(Amimut)’을 철저히 유지해 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안보의 핵심 기밀은 지킨다는 초당적 합의를 준수하기에 가능했다. 반면, 우리는 북한의 핵 독점과 주변 강대국의 위협 속에서도 내부 정쟁에 매몰돼 독자적 억제력 확보와 확장억제 실행력 강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핵보유국인 중국·러시아와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은 자명하다. 북한의 핵 교리와 전술이 고도화하고 600㎜ 방사포와 155㎜ 자주포까지 현대화하는 상황에서 감성적 민족주의나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대북정책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국가 목표와 안보 전략을 원점에서 재정립해야 한다. 대한민국호가 생존하려면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국가전략 수립이 시급하다.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혼선과 무능을 종식하고, 전략적 사고와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을 배치해 무너진 안보 체계를 재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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