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석 정치부 차장

①충분한 고통 ②분명한 목표 ③적어도 한 번의 기회. 소설가 김영하는 예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사랑받는 영화나 소설 캐릭터의 공통점으로 이 세 가지를 얘기했다. 고난 없는 순탄한 삶, 간절한 소망 없는 삶은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목표를 실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서사 역시 긴장감이 없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김영하가 말한 ‘3요소’를 완벽히 충족하는 지도자다. 검찰은 과거 야당 대표이던 이 대통령을 집요하게 수사해 의도치 않게 고통의 서사를 쌓도록 도왔다. ‘박근혜 탄핵’ 정국 때 대통령을 향한 열망을 품은 이재명은 윤석열의 계엄 자폭으로 마침내 목표를 이루고, 국민을 위해 일할 기회도 얻었다.

그런데 이미 최고지도자가 된 이 대통령은 집권 2년 차에 접어든 올해부터 부쩍 과거의 고통에 대한 언급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직접 소통의 창구인 X를 통해 ‘위례신도시 개발비리 의혹’과 관련한 검찰의 녹취록 변조를 비판했다. 3월에는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의 녹취록 보도를 공유하며 “증거조작은 납치살인보다 더 나쁜 짓”이라고 했다. 지난달에는 3년 전 한국신문상을 받은 한 언론의 대장동 의혹 보도가 ‘조작’이었다며 수상 취소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 사건에 대한 공소를 취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특검법은 이 같은 고통 호소에 대한 여당의 화끈한 응답이다. 청와대는 논란이 확산하자 “숙의해달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예상 밖 기회를 잡은 국민의힘이 총공세를 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보 진영조차 충정 어린 비판을 쏟아내고 있어서다. 권력 분립을 훼손한다는 법률적 지적부터 대통령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정무적 조언까지 다양하다.

이 대통령이 겪은 고통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또한, 이 대통령이 아니라도 최고권력자는 누구나 ‘퇴임 후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멈춰진 재판을 모두 없애는 공소취소는 ‘자연인 이재명’의 바람일 수는 있어도 ‘대통령 이재명’의 지향이 될 수는 없다. 특검은 검찰 수사·기소의 적절성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먼저다.

진영을 막론하고 제기되는 비판은 모두 경청할 만하지만, 이 대통령 입장에서 작금의 논란이 특히 뼈아픈 이유는 공소취소 조항이 국정에 대한 진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점철된 서사는 이 대통령에게 대선 승리를 안긴 결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70%에 육박하는 지지율은 지난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성실히 활용하는 국정에 대한 국민의 보상이다.

이 대통령이 이제는 국민을 믿고, 뒤가 아니라 앞만 보고 달렸으면 한다. 고통에 천착하는 대신 국민이 부여한 기회를 더 빛나는 열매로 맺는 데 집중했으면 한다. 공소취소 조항 삭제는 이런 용기 있는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부동산 정상화와 양극화 해소, 노동 개혁 등 이 대통령이 띄운 어젠다는 하나같이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상되는 난제들이다. 이 대통령이 늘 참모들을 독려하듯, 속도를 높여도 일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나윤석 정치부 차장
나윤석 정치부 차장
나윤석 기자
나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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