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이번 주,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예장동에 있던 조선통감부)에서 개최된 제5회 조선 미술 전람회 때문인지 예술가들에 대한 기사가 연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26년 5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에는 보기 드문 한 여성 예술가에 관한 기사다.
“연년(年年)히 열리는 미술 전람회에 혹은 글씨로 혹은 사군자로 또박또박 입선의 영광을 받던 혜연(惠淵) 방무길 여사를 관수동 143번지로 찾았습니다. 일찍이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히 그림에 대하여 재주가 있고 취미가 깊은 혜연 여사는 가정의 주부로 여섯 아기의 어머니로 심히 바쁘고 일이 많은 가운데 있건마는 자기의 예술적 천품(天稟)을 발휘시키기에 많은 노력을 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여자 가운데도 글씨를 잘 쓰며 묵화(墨화)를 잘 치는 이가 많았다고 하건마는 최근에 이르러서는 썩 드물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도 채색칠을 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환장이라 하여 낮춰 보았지마는 묵화 치는 것은 썩 고상하게 여겼습니다. 눈같이 흰 종이에 아무 채색이 없고 다만 검은 빛으로 된 그림자 가운데는 무한한 취미와 상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술 전람회에 가보신 양반은 다 아시려니와 혜연 여사의 난초와 매화는 진실로 우리의 동양적 취미가 진진하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담하고 청백한 감을 갖게 됩니다.”
이어 방 여사는 자신의 미술 입문과 작품활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군자에 대하여서 어려서부터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7∼8년 전부터 해강(海岡) 김규진 씨에게 배우기를 시작하였습니다마는, 가정을 갖고 아이를 기르고 하노라니 자연히 틈이 없어서 충분히 그릴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출품한 것도 그리기 시작하여 해산달이 되고 해산을 하느라고 되는 대로 막 그리다시피 한 것이어서 남에게 내어놓기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에 관한 보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22년 5월 22일 매일신보의 ‘용사비등(龍蛇飛騰·아주 활기 있게 잘 쓴 필력)의 필법’이란 제목의 기사에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방년 25세 된 방무길 여사는 본래 경성 태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필재(筆才)가 비범하여 인리(隣里·이웃에 있는 마을)에서 찬양을 받았다. 17세에 경성부 내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4년 전부터 서화협회에 입회하여 해강 김규진 씨에게 서화를 배우는데, 행서·초서·예서 등 삼체(三體)의 대자(大字)는 선생 제자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능란하였다. 그 밖에도 난죽(蘭竹)의 화(화)를 잘 그리는 고로, 해강 선생의 제일 사랑하는 수제자가 되었는 바, 이전에 삼월오복점과 제일은행에서 서화 전람회를 열었을 때에 두 가지를 출품하여 두 번의 표창을 받았다. 지금은 금강산 어떤 절의 의뢰로 길이 28척(약 8.5m), 폭이 6척(약 1.8m) 되는 오십삼불(五十三佛)이란 대자를 써서 금강산 유점사 효운동 석벽에 조각하는 중이라는데, 혜연 여사의 서법은 탄복치 아니 하는 이가 없더라.”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