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미 문화부 차장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지난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공개된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얘기다. 올해 한국관 주제는 ‘해방공간:둥지와 요새’. 한국관 커미셔너(운영총괄)인 한국예술위원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과 독재, 계엄 정국을 극복한 한국인들의 해방 의지를 떠올리고, 새로운 주권 개념을 실천하기 위한 현재진행형의 운동 공간’이다. 풀이가 사뭇 비장하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땠나.

오간자 직물 4000장으로 꾸려진 ‘둥지’에 애도, 기억 등의 소영역을 품은 노혜리 작가의 ‘베어링’은 슴슴하고 밋밋했다. 애도 영역에 출품된 소설가 한강의 설치작품만이 스쳐 지나는 발들을 잠시 묶어뒀다. 동파이프 구조물인 최고은 작가의 ‘메르디앙’은 건물을 뚫고 외부로 뻗어 나가며 한국관을 ‘요새’화했다. 그러나 금세 기세가 꺾여 일본관 마당 귀퉁이에 스러졌다. 비엔날레 최초의 한일 협업이라더니, ‘시각적 힘’의 부족으로 그 의미까지 바랜다.

주제의식에 도취된 조형물들은 감흥 대신 설명만 잔뜩 제공했고, 느낌 대신 이해를 요구했다. 500쪽에 이르는 전시도록이 방증이다. 이토록 두툼한 ‘설명서’가 필요한 전시라니, 한국관은 작정하고 시각예술의 언어를 내던진 듯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전시장인가, 아니면 기록관인가. 왜 한국관엔 새로운 시각언어와 감각 경험도, 인식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도 없는가. 우리가 가진 예술적 상상력의 한계는 고작 여기까지인가…. 이웃한 일본관에 몰리는 인파와 종일 한산한 한국관을 보면서 질문과 탄식은 더욱 증폭됐다.

전시를 기획한 최빛나 예술감독은 한국관을 “살아 숨 쉬는 기념비”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2024년 겨울에 떠오른 발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해방공간’의 모체는 12·3 계엄부터 4·4 탄핵에 이르는 특정 시기의 감각과 정신. 한국 사회가 극렬하게 분열하고, 혼란스러웠던 때다. 이것을 예술로 치환하는 일은 정당하다. 예술과 정치는 늘 함께 다니며, 베니스비엔날레는 지난 130년간 세계의 불안을 가장 먼저 감지해 온 현대미술 최전선이다. 문제는 한국관이 다룬 민주주의와 기억의 서사가 현대미술에서 질리도록 반복돼, 너무 익숙하다는 점이다. 또, 정치를 다뤄도 예술로 증명하는 건 별개다. 한국관 전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정치적 언어를 재생산했고, 예술적 소통에서도 실패했다. K아트의 성취를 발신하기 위해 ‘K정치’를 소환했다면(순서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우리만의 새로운 감각적 충격이나 미학적 발견도 따라와야 했다. 완성도 높은 예술로서, 명분과 존재를 입증해야 했다. 즉, ‘예술적’이어야 했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적 주장을 말하더라도 예술적 성취가 없으면 프로파간다(선전)에 불과하다.” 최근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한 말이다. 결국, 작품은 ‘예술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이는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현대예술에 적용된다. 1995년 ‘미술 올림픽’에 입성한 지 30년. 한국관은 99개 국가관 중에서도, 국제 미술의 담론을 이끄는 주요 29개 국가관에 속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만의 ‘예술 언어’를 찾지 못했다. ‘정치적 정당성’ 뒤에 숨고, 노벨 문학상 작가의 문학적 성취에 기댔다. 게으르고 비겁한데, 안목도 별로다. 제주 4·3 사건을 형상화한 한강의 설치작‘장례식’은 아무리 그의 명성을 고려해도, 비엔날레에 올 만한 예술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박동미 문화부 차장
박동미 문화부 차장
박동미 기자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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