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Z 핫플서 쉼터로 변모
창덕궁 부용지·주합루 ‘인기’
창경궁에선 ‘워케이션’ 진행
덕수궁 클래식 공연도 눈길
궁중문화축전 72만명 동원
유적 해설보다 체험에 초점
젊은층 힐링중심 소비 영향
오전 7시 반,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창덕궁. 개장 준비로 분주한 이곳에 지난 15일 이른 아침부터 25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이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왕실의 비밀스러운 휴식처, 창덕궁 후원이다. 평소 굳게 닫혀 있던 이곳이 ‘무언자적(無言自適), 왕의 아침 정원을 거닐다’ 프로그램을 위해 특별히 빗장을 풀었다.
이날만을 위해 빌려온 진달래 빛 한복을 부지런히 차려입은 20대 여성부터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의기투합한 모녀까지, 참가자들은 왕이 사색을 즐기던 작은 연못 ‘부용지’로 향했다. 도착한 곳에는 정조가 창건한 2층 누각 주합루와 그 앞으로 펼쳐진 한적한 연못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공간이 주는 유유자적함에 매료돼 연신 터지던 카메라 셔터 소리. 15분간의 온전한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차츰 잠잠해졌다. 주합루 마루에 가만히 앉아 부용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낯설고도 고즈넉한 평화. 궁궐이 이토록 완벽한 ‘쉼’의 공간이 되었던 적이 있던가.
최근 궁궐이 쉼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핫플레이스’로 각광받으며 이른바 ‘힙트래디션’ 열풍을 주도한 궁궐과 왕릉이, 이제는 보는 것을 넘어 머물며 쉬는 공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지난 2024년 시작된 창덕궁의 ‘무언자적’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14∼17일 나흘간 회당 25명 한정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평소 출입이 제한되는 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주합루 일대를 거닐며 수백 년 된 나무와 연못, 정자를 감상할 수 있다. 참가비는 1만 원. 매년 봄·여름 무렵에 진행되는데, 사전 예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음에도 예매 시작 1분 만에 매진되는 등 해를 거듭하며 인기가 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해설을 최소화하고 관람객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향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과거 왕들이 이 공간을 누렸던 방식 그대로. 1분가량의 해설이 끝나고 주어지는 15분의 자유시간 동안 참가자들은 서향각, 주합루, 천석정 등 전각 내부에 앉아 명상을 하거나 미리 챙겨온 책을 읽으며 각자의 고요를 즐겼다.
올해 72만5000명이라는 역대 최다 관람객을 동원한 전통문화축제 궁중문화축전에서도 ‘휴식’은 핵심 키워드였다. 3일까지 열린 행사에서 첫선을 보인 프로그램 창경궁 ‘영춘헌, 봄의 서재’. 정조가 독서를 즐기던 영춘헌에서 책을 읽고 궁중 차를 마실 수 있게 기획돼 사전 예약 조기 마감은 물론, 현장 대기 줄까지 길게 이어질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고풍스러운 전각 내부에 개인 책상을 마련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독서나 가벼운 업무를 볼 수 있게 한, 이른바 궁궐에서의 ‘현대적 워케이션’을 구현한 셈이다. 이외에도 덕수궁에서는 17일까지 클래식 연주와 함께 고종이 즐기던 가배(커피)와 디저트를 맛보는 ‘덕수궁 밤의 석조전’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궁궐 내 휴식·힐링 프로그램이 급증한 배경에는 젊은 세대의 달라진 문화소비 성향이 자리 잡고 있다. 이상희 창덕궁 학예실장은 “그동안 궁궐 내에 수많은 해설 프로그램이 안착한 만큼, 이제는 관람객이 공간을 직접 향유하고 쉴 수 있는 체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최근 젊은 세대가 원하는 편안함과 쉼과 같은 키워드에 맞춰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고 설명했다.
‘희소성’도 프로그램의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평상시 관람객에게 개방하지 않는 구역이 특정 프로그램을 위해 제한적으로 열리기 때문에,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누릴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크다. 영춘헌 내부나 창덕궁 후원도 평소 관람 중에는 가볼 수 없는 곳이다. 이 같은 공간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진 고궁 정비사업 덕에 늘어나는 추세다.
다만, 문화재 보호라는 본연의 목적 때문에 궁궐 시설 활용이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숙제로 남는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안정민 사무관은 “상시 개방은 궁궐의 훼손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관리 인력도 추가로 보완해야 해 어려움이 있다”며 “상시 개방 공간은 여력이 되면 늘려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신재우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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