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2차대전의 비극 품은 오키나와 (下)
여학생 등 240명 전쟁에 징집
동굴 생활하다 절반 이상 숨져
참상 기리는 ‘히메유리 기념관’
전쟁 이후 심각했던 물자부족
엔진오일로 튀겼던 ‘모빌튀김’
지금은 전통간식 ‘사타안다기’
밀가루로 만든 ‘오키나와 소바’
세대 이어 추억이 된 지역음식
엄격한 인증으로 정체성 지켜
450년간 독립 왕국이었던 섬
은행·온천… 곳곳 ‘류큐’ 흔적
불타버린 슈리성 가을에 완공
오키나와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일본 오키나와의 에메랄드빛 바다 뒤편에는 2차 대전 최대 지상전의 상흔이 남아 있다. 지상낙원의 풍경과 최악의 비극의 기억이 시차를 두고 같은 곳에 있는 셈이다. 맑은 날 오키나와 바다의 투명한 아름다움과 테마파크의 즐거움을 지난주 (上) 편에 썼으니, 이제는 비 오는 오키나와서 마주했던 과거의 기억 얘기다. 여행지에서 비극의 기억 얘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 남국의 휴양지에 바다를 즐기러 온 여행자들에게 굳이 전쟁 얘기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흥분과 기대, 즐거움과 만족감을 나누기도 모자란 시간에 따분한 역사나 마음 불편해지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게 적절한 걸까. 비 오는 날의 차분한 여정 중에 정리된 생각은 이랬다. 여행이 오로지 흥분과 기대로만 완성되는 건 아니듯이, 불편한 마음이 꼭 여행의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많은 걸 알면 불편할 수 있지만, 때로는 불편해서 ‘더 좋은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 오키나와 여행과 한국인
오키나와를 여행하면 어디에서든 합병으로 인한 차별, 뒤이어 이어졌던 참혹한 전쟁, 전후의 극심했던 고통 등에 대한 이야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휴양 여행을 왔다 해도 오키나와에서는 절대로 그걸 비켜 갈 수 없다. 오키나와 사람 네 명 중의 한 명이 총알받이가 돼서 영문도 모르고, 명분도 없이 죽어 나갔던, 오키나와 전투의 상처가 워낙 깊어서 그렇다.
여행지에서의 ‘불편한 마음’은 드문 게 아니다. 초호화 특급리조트 문만 나서면 빈민촌과 구걸하는 아이들이 있는 저개발국가 휴양지에서 자주 맞닥뜨리곤 하는 ‘죄책감을 수반한 불편함’이 대표적이다. 오키나와에서 경험하는 건 이런 것과는 결이 다르다. 오키나와에서의 불편함의 근원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의 일. 두어 세대 전의 일이라 내가 뭘 어째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덕적 책무’가 없다는 의미다.
비극의 공간에서 여행자들이 남길 수 있는 건 오로지 애도와 공감, 그리고 평화에 대한 지지다. 이걸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한국인 여행자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에게 오키나와가 겪은 차별과 전쟁의 참상은 ‘남 얘기’가 아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했던 한국에서 온 여행자는 전쟁과 죽음의 자취 앞에서 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국인 여행자라면 누구보다 더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 그들은 일본인일까, 아닐까
오키나와에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태평양 전쟁의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에다 조성한 대표적인 추모 공원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돌아보고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인 18만8136명이 죽었다. ‘일본인’이라 뭉뚱그려 말하지만, 사망자 중 오키나와 현 출신이 12만2228명이나 된다. 그 시절 오키나와 전체 인구가 57만4368명이었으니, 4명 중 1명이 오키나와 전투로 사망한 셈이었다.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내몰렸다가 죽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과연,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을까. 전쟁의 당위에 공감한 이가 있었을까, 아니 전쟁의 이유라도 알고 있었을까.
평화기념공원이 규모도 크고 자료관도 방대하지만, 그곳보다 몇 배나 더 인상적이었던 곳은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이었다. 히메유리 기념관은 전쟁 당시 부상병 간호에 동원된 어린 여학생들의 희생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우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자 세운 장소다.
‘히메유리’란 일본 육군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직전이던 1945년 3월, 두 학교 여학생과 교사 240명을 징집해 편성한 부대 ‘여학생 학도대’의 명칭이다. 부대 이름은 오키나와 현립제일고등학교의 교지(校誌) ‘오토히메(乙女·용궁선녀)’와 오키나와사범학교 여자부 교지 ‘시라유리(白百合)’를 조합해 만들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사라진 두 학교에서 전쟁 직전에 13세부터 19세까지 소녀 1150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 얼굴과 이름이 있는 비극의 슬픔
일본군은 “일주일만 근무하면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며 호언장담하며 여학생을 징집해 히메유리 학도대를 꾸렸다. 여학생들은 부상병 간호 등의 임무를 맡아 포격을 피해 방공호 동굴 속에서 비참하게 생활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캄캄한 동굴 속에서 부상병을 옮기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결국 학도대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전투 중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강요된 집단 자결로 세상을 뜬 경우도 있었으며, 무책임한 해산 명령으로 포격에 희생되기도 했다. 그저 전쟁의 도구였을 뿐, 아무도 어린 소녀들을 돌봐주지 않았다.
히메유리 평화기념관은 오키나와 전투 이듬해인 1946년 유족들이 세운 ‘히메유리의 탑’ 뒤쪽에 4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건립됐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동급생과 교사에 대한 통한과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자책에 시달리던 생존자들은 전후 오랫동안 당시의 비극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들이 전쟁의 실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건 1980년대 들어서다. 이후 동창회가 주축이 돼서 7년여에 걸쳐 증언채록, 전시자료 수집 등을 거쳐 1989년 평화기념관을 완공했다.
히메유리 기념관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건 13세 남짓 꽃다운 소녀의 사진과 소지품, 편지 등을 통해 죽은 이들의 비극을 실재적으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평화기념공원의 전쟁으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전쟁이 가져온 ‘비극의 규모’를 말해준다면, 히메유리 기념관의 전시물은 희생자들이 한 명 한 명 실재했던 소중한 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기념관 입구에 걸어놓은 전쟁 직전에 찍은 단체 사진 속에서 교복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여학생들의 단체 사진이 마음 아프다.
# 엔진오일로 튀김을 해먹었다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비극은 한동안 계속됐다. 목숨을 건진 이들도 전후의 물자부족으로 인한 기아로 고통받아야 했다. 그 시절의 믿기 어려운 비극적 사건이 끝도 없다. 전쟁이 낳은 비극적인 식재료와 관련한 오키나와 이야기 중 대표적인 게 ‘모빌(Mobil) 튀김’이다.
오키나와에는 전통 간식 ‘사타안다기’가 있다. 밀가루에다 흑당으로 단맛을 낸 동그란 도넛이다. 지금도 대중적인 간식으로 오키나와의 식당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사타안다기는 미국에서 온 음식이다. 일본의 설탕 가격 폭락으로 오키나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오키나와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고, 그중 많은 수가 정착한 하와이에서 도넛이 들어오면서 변형을 거쳐 오키나와의 특산 음식이 됐다.
전후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사타안다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어찌어찌 구호용 밀가루나 수확한 사탕수수를 구할 수 있었지만 튀김용 기름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게 ‘모빌 튀김’이다. 모빌 튀김이란 사타안다기를 차량용 엔진오일에다 튀겨서 만든 음식을 말한다. 엔진오일을 식용 기름으로 쓰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 얘기. 이걸 먹고 무사할 리 없었다. 복통이나 설사는 물론이고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얘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엔진오일인 줄 모르고 불법유통되는 기름을 튀김용으로 쓰다가 난 오용사고라는 것. 그게 괴담 형식으로 퍼져 일상 음식처럼 포장됐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독성을 알면서도 당장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정제한 엔진오일을 튀김용 기름으로 상시로 썼다는 설이다. 둘 중 어떤 경우든 모빌 튀김은 전후 오키나와 주민들의 고통과 피폐한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 오키나와 소바의 법적 지위
음식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소바’가 있다. 소바는 메밀로 만드는 국수인데, 오키나와 소바는 밀가루로 만든다.
메밀 농사는 물론이고 밀 농사도 잘 안되는 오키나와에서 면 요리는 호사스러운 고급요리였다. 그러다 미국 원조물자로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오키나와에서는 밀가루로 소바를 만들어 먹었다.
메밀을 구하기 어려워 냉면 대신 밀가루로 밀면을 만들어 먹었던 우리의 부산밀면의 사례와 거의 유사하다. 부산은 냉면 대신 ‘밀면’이란 이름을 썼지만, 오키나와는 ‘소바’란 이름을 고집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정기를 거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이후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문제를 제기했다. ‘메밀로 만들지 않으면, 소바란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유권해석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반발했다. 2년여에 걸친 오키나와 민관의 노력에 힘입어 1978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소바 관련 규약을 개정했다. 밀가루로 만들었어도 ‘오키나와 소바’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규약이 개정된 10월 17일을 ‘오키나와 소바의 날’로 지정하고 해마다 축제를 열고 기념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소바란 이름에 연연했던 건 오키나와 소바가 일상의 위로이자 세대를 잇는 추억이며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음식이어서다. 지역의 일상 음식이 법적 정의를 획득하자, 오키나와는 한발 더 나가 엄격하고 까다로운 인증체계까지 만들었다. 오키나와 소바라고 부르려면 제조장소가 반드시 오키나와 현 안에 있어야 하고 손반죽 공정을 거쳐야 하며, 단백질과 회분 수치가 규정된 밀가루를 쓰고 숙성시간은 짧아야 하며 삶기 전에 손으로 비벼 면 결을 살리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심지어 면 삶는 물의 수소이온 농도와 삶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다.
# 고국으로 보낸 550마리 돼지
오키나와 소바에는 보통 삶은 돼지고기를 고명으로 얹는데, 돼지고기에도 사연이 있다. 돼지고기는 류큐(琉球) 왕국 시기까지 전통이 이어지는 이른바 ‘소울푸드’ 같은 것이다. 명나라에서 돼지 사육기술을 받은 류큐 왕국은 일본이 불교 영향으로 육식을 금기시할 때,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궁중요리로 돼지고기 요리를 발전시켜 왔다.
마을행사나 명절이면 돼지를 잡아 온 마을이 고기를 나눠 먹기도 했다. 우리 돼지갈비 조림과 비슷한 ‘라프테’나 돼지 귀를 잘라 무친 ‘미미가’ 등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잡은 돼지를 귀하게 여겨 정성껏 조리했던 식문화를 반영한다.
태평양 전쟁 직후, 오키나와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이 기아로 고통받을 때 일찌감치 하와이로 이주해 정착한 오키나와 교민들이 5만 달러를 모금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해 번 돈이었다.
그 돈으로 돼지 550마리를 구입해 배에 실어 고국으로 보낸 게 1948년의 일이었다. 그 550마리의 돼지가 불과 10여 년 만에 수만 마리로 불어나 고국 주민의 식탁에 올랐다. 낯선 타국 땅에서 고된 노동으로 번 피땀 어린 돈이 고향의 밥상을 다시 차리게 한 셈이었다.
오키나와 소바는 맛의 편차가 큰 편이다. 국물은 돼지 뼈에다 가쓰오부시 향을 섞는데, 기름지지 않고 담박해서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특히 살짝 덜 익은 듯한 밀가루 면의 질감이 매력적이다.
오키나와에서 맛본 소바 중에서는 비를 피하려다가 들어갔던 식당 ‘슈리사보(首里茶房)’의 것이 압권이었다. 류큐 왕국 시대의 관료 집을 개조해 만든 마당이 있는 전통가옥의 분위기도 훌륭했다. 그날 먹은 소바에 고명으로 얹어 나온 돼지고기를 보며 전후의 고통받던 시절 서로를 보살폈던 동포애와 강인한 생존의식을 생각했다.
# 류큐 왕국에서 오키나와까지
오키나와의 대표 명소는 슈리(首里)성이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에 강제 편입됐지만, 그 이전 450년 동안은 독립된 류큐 왕국이었다. 언어도, 음식도, 문화도 일본 본토와는 달랐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왕이 살던 성이었다. 그 얘길 하려면 류큐 왕국에서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과정의 역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키나와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는 12세기부터다. 그 이전에도 오키나와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문명도 있었겠지만, 글로 쓰인 역사는 그때부터다. 12세기 무렵 3개의 세력이 힘을 겨루던 오키나와는 1429년에 비로소 통일왕국이 됐다. ‘류큐 왕국’의 시작이었다.
류큐의 이름은 지금도 오키나와 곳곳에 있다. 류큐 은행, 류큐 온천, 류큐 호텔, 류큐 신보(신문)…. 류큐란 이름을 앞세운 식당은 이루 다 세지 못할 정도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류큐 왕조를 잊지 않았고, 적어도 음식에서만큼은 왕국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증거다.
류큐 왕국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지위를 이용해 교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류큐 왕국은 조선과 명나라는 물론이고, 안남(베트남), 시암(태국), 자바(인도네시아), 루손(필리핀), 믈라카(말레이시아)와도 활발한 중개 무역을 펼쳤다.
류큐 왕국은 1709년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의 침략으로 독립왕국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간섭을 받아야만 했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 1879년에는 나라 이름을 빼앗겼고 주권마저 잃었다. 류큐 왕국 정부를 해산하고 오키나와란 이름으로 일본의 변방으로 편입시키는 이른바 ‘류큐처분’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궤멸적 패배로 오키나와는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미국의 지배라고 뭐 그리 좋을 게 있었을까. 그러다가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반환됐다. 여기까지가 일본이면서 어쩌면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의 대략의 역사다.
# 새로 지은 슈리성을 보는 법
오키나와를 돌려받은 일본은 1986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슈리성 정비사업을 시작했다. 설마하니 류큐 문화를 부활하려는 건 아니었을 테고, 미국에 돌려받은 자국의 ‘변방문화’를 재건해 오키나와 반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복원은 결정했으나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천신만고 끝에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1700년대 슈리성을 모델로 슈리성을 지었다. 1988년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시작해 2019년 1월 슈리성은 완전 복원이 됐다.
그러나 1년이 채 못 된 2019년 10월 화재로 슈리성의 주요 전각들이 모두 다 불타버렸다. 다시 지난한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슈리성 복원 작업은 약 7년만인 오는 가을쯤 마무리된다. 지금은 정전의 일부분만 가림막으로 가린 채 막바지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새로 지은 슈리성은 짐짓 오래됐음을 가장하지 않는다. 세월을 인위적으로 묻히려는 시도도 없다. 문화재적 가치를 ‘원형’으로 잰다면 새로 짓다시피 한 슈리성은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와 고증을 토대로 지었다지만, 성벽의 돌을 빼면 거의 모든 부재가 새것이나 다름없어서다.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왕국의 성은, 오래된 시간으로 가치가 평가되는 골동품이나 도자기와는 다르다.
슈리성은 부자재가 얼마나 오래됐느냐로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게 아니라, 왕국의 존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류큐 왕국을 기억하고, 왕국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사람들에게 슈리성은 ‘기억’이자 ‘형태’다. 새로 지은 것이라 할지라도 의미는 변함이 없다. 봐야 하는 건, 보이는 것 그 너머다.
■ 잔파곶
오키나와에는 에메랄드 빛깔의 낭만적인 바다만 있는 건 아니다. 오키나와 중부의 명소로 꼽히는 ‘잔파곶(殘波岬)’은 거칠고 박력 넘치는 바다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수직의 해안 직벽이 길게 이어진 경관도, 해안을 때리는 거센 파도도 비장미가 넘친다. 잔파곶의 등대에 오르면 짙푸른 바다와 해안절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잔파곶 산책로에는 류큐 왕국 시절 외교관이자 상인이었던 다이키(泰期) 동상이 있다. 동상은 거센 파도를 뚫고 먼 바다로 나간 그의 용기와 개척정신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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