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이의 올댓클래식 - 새 영역 넓히는 피아니스트들
트리포노프, 재즈·스윙 아울러
조성진, 헨델의 유려한 면모 조명
올라프손, 드뷔시·모차르트 탐색
스타 피아니스트는 왜 때론 낯선 곡을 치는가. 한때 피아니스트들은 특정 작곡가 이름과 함께 기억되었다. 루빈스타인 하면 쇼팽, 켐프나 브렌델은 베토벤, 시프나 코롤리오프 하면 바흐가 떠오르는 식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연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최근 젊은 거장들은 비교적 생소한 레퍼토리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얼굴을 새롭게 그려 나간다.
이때 영역 확장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세계 무대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은 연주자가 왜 지금, 왜 이 작곡가를 고르는가의 문제다. 공연 프로그램과 음반 목록은 그들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장하고 선언하는 행위에 가까워지고 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그 대표 사례다. 트리포노프는 압도적인 기교와 ‘접신(接神)’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완벽한 몰입으로 한때 러시아 피아니즘 계보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요즘 그는 이런 이미지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있다. 2024년 발매된 ‘나의 아메리칸 스토리(My American Story)’는 그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보낸 미국을 음악적으로 탐색하는 프로젝트다. 재즈, 스윙, 영화 음악까지 아우르는 곡들은 트리포노프가 기존 틀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2025년 차이콥스키 음반 역시 흥미롭다. 트리포노프가 같은 국적의 작곡가를 택했다는 사실이 의외는 아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덜 알려진 독주 피아노 작품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앨범은 초기 피아노 소나타, ‘어린이를 위한 앨범’, ‘잠자는 숲속의 미녀’ 편곡 등 소곡들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청자를 압도하는 기교나 대곡으로 향하지 않았다. 화려한 비르투오소 자리에서 내려와 20세기 미국 음악과 차이콥스키의 지극히 사적이고도 내밀한 공간을 들여다본 것이다. 이는 연주자로서 자신의 해석 지평을 넓히는 일에 가깝다.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 역시 이런 흐름을 보여 준다. 그는 바흐, 현대 작곡가 필립 글라스, 18세기 작곡가 라모, 드뷔시, 모차르트와 동시대 작곡가들을 종횡무진 오가며 음반을 마치 전시처럼 구성해 왔다.
바흐를 투명한 음향 속 새로운 해석으로 들려주며, 모차르트는 같은 시대 음악 동료들과 함께 바라본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모차르트는 동시대 대가들과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18세기 음악인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그의 피아노 독주회나 음원들이 종종 전시회처럼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성진의 최근 3년간 행보도 비슷한 흐름 안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라는 빛나는 명성과 함께 연주자 이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 우승자 윤디 리가 거듭되는 실력 퇴보 논란 속에서 무너졌듯, 이는 하나의 굴레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성진은 그 후광에 안주하지 않았다.
2023년 ‘헨델 프로젝트(The Handel Project)’는 변모의 전환점으로 꼽을 만하다. 헨델의 건반 모음곡 일부와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푸가를 함께 배치한 음반은, 피아노 이전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 레퍼토리와 브람스의 응답을 동시에 조망하는 시도였다. 2025년에는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독주 피아노 전곡과 협주곡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라벨 특유의 감각과 색채감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이 전면에 표출된 것이다.
이 선택은 조성진의 피아니즘을 새롭게 보게 한다. 헨델 건반 작품은 옛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바흐에게 밀려 주목받지 못했다. 많은 이가 조성진의 헨델을 통해 바흐와는 다른 헨델의 유려한 면모를 알게 되었다. 라벨 역시 마찬가지다. 인기곡을 추린 선집이 아닌 전곡 독주 녹음을 통해 작곡가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제공했다.
세 피아니스트를 하나로 묶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다. 트리포노프, 올라프손, 조성진은 저마다 고유의 개성과 강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공통점은 ‘확장’에 있지 않을까. 오늘날 스타 연주자의 레퍼토리는 하나의 지도와 같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자신의 예술적 반경을 어디까지 넓혀 가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 말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과 이미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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