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자신 없으세요?” 2023년 1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장단 워크숍에서 한 말이다. 당시 반도체 부문은 조(兆) 단위 적자를 내는 위기였다. 투자 축소가 불가피했다. 이미 SK하이닉스는 설비투자를 반 토막 내는 극약처방을 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 회장의 독려에 ‘50조 원 투자 유지’로 급선회했다. 돈이 달리자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 원을 빌리기까지 했다.

그 결과물이 평택 캠퍼스 P3와 P4, 미국 테일러 공장이다. 가장 먼저 투자가 집중된 P3의 주력 생산품은 고성능 DDR5 D램과 대용량 SSD(보조기억장치)다. AI 서버용 수요가 폭발하면서 지난 1분기 57조 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비밀병기다. 지금 태풍의 눈은 P4다. 당시 ‘셸 퍼스트’(Shell First) 전략에 따라 건물 골조라도 먼저 세워 놓은 공장이다. 지난해부터 차례로 생산 설비를 들여와 첨단 1c D램과 차세대 HBM4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덕분에 지난해 말 D램 시장 1위를 되찾았고, 지금은 HBM 시장 선두 자리까지 노리고 있다.

현재 P4는 칩 생산을 늘리기 위해 ‘임시 사용’까지 할 정도다. 구역별로 미리 클린룸을 만든 뒤 선제적으로 핵심 설비를 반입해 장비 셋업과 시운전에 필요한 6개월의 물리적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아예 P5부터는 ‘쌍둥이 팹’(Twin Fab) 전략을 동원하고 있다. 똑같은 라인을 만들어 복잡하고 소모적인 검증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다. 이미 빅테크들과 3∼5년 단위의 장기 공급계약을 맺은 만큼 더 빨리 양산할수록 이익이 커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운명은 미 테일러 공장에 달렸다. 반도체법 보조금 협상으로 시간이 지체됐지만 올 하반기 시범 생산, 내년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간다. 당초 4나노 공정을 계획했다가 2나노 이하의 첨단 공정을 채택해 첫 일감으로 테슬라의 차세대 AI 칩 계약을 따냈다. 지금은 엔비디아가 그록칩, 퀄컴은 차세대 스마트폰용 AP, 구글이 AI용 TPU 위탁생산을 맡기기 위해 앞다투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3 등 초기 AI 메모리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주며 뼈아픈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3년 전 위기 상황에서 과감하게 투자했다.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설 토양을 구축한 셈이다. 돌아보면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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