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내 대표적 지한파 외교관으로 꼽혀온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수석부차관보는 요즘 스페인 발렌시아에 산다. 2024년 미국 대선 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가 출범할 때, 버지니아에 있는 집을 판 뒤 아예 스페인으로 이사를 갔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아 1주에서 2주 단위로 여행하던 그는 더 자주 그 길을 만나기 위해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 시대를 견디기 어려워 미국을 떠났는데 스페인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처럼 트럼프 시대 미국을 떠난 전문직 인사들은 수없이 많다.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2024년 대선 이후 캐나다로 이주했다. 베스트셀러 ‘폭정-20세기의 스무 가지 교훈’을 펴낸 그는 요즘 토론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예일대 동료였던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 교수도 토론토대로 옮겼다.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참을 수 없고, 아이들도 힘들어 한다는 게 이들이 내건 이유다.

영화계 인사들의 엑소더스도 잇따른다.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매일매일 자동차사고가 나는 것 같은 나라에서는 살기가 어렵다”며 떠났다.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여주인공 로빈 라이트와 토크쇼 사회자인 엘런 디제너러스는 “엉망진창인 미국이 싫어졌다”며 영국으로 갔다.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는 부인 아말 클루니와 함께 2025년 말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뒤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미국에선 아이들을 키우기가 어렵다”고 했다.

트럼프 시대 미국인들의 ‘탈미(脫美)’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CNBC는 브루킹스연구소 자료를 인용해 “2025년 미국의 순유출 인구가 최대 29만5000명으로 추산된다”면서 “이민 유입보다 유출이 많은 순이민 마이너스 현상은 50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연방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지난해 순이민은 130만 명으로 줄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초강경 이민·추방 정책으로 신규 이민이 차단된 탓이 크지만, 리비어나 클루니 같은 인사들의 외국 이주도 한 원인이다. 똑똑한 이들이 떠나는 나라가 됐다는 건 세계 최강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한 징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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