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100년 전 이번 주 신문에는 한 여성의 나눔, 그리고 가난한 아동 교육을 위해 지역 사회가 힘을 모은 이야기가 실려 따뜻함을 전한다.

먼저 1926년 6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야기를 들어보자. “평남 강서군 성암면 대안리 김영간 씨의 미망인 김 씨는 19살에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와 남편을 위하여 길쌈과 바느질품을 팔아가면서 지성스럽게 공경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히 남편이 혼인한 지 3년 만에 고치지 못할 병마(病魔)에 걸려 21세 된 아내를 두고 20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황천길을 떠나버렸습니다. 한 명의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은 김 씨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함을 마지아니하며 3년 동안을 남편의 묘를 지키고 살았다고 합니다. 3년 상(喪)을 마친 후 친족 여러 사람들은 김 씨더러 개가(改嫁)하기를 여러 번 권하였으나 김 씨는 ‘남편에게 이미 굳게 맹세하고 허(許)한 몸과 마음을 다시 누구에게 허하지 못하겠노라’하고 맹렬히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시부모를 섬기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해나가 그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 섬기기 어려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더군다나 김 씨는 친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계모 시어머니를 섬기고 살았다 하며, 구(舊) 한국시대에 효부 열녀의 표창까지 받았다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 씨는 부지런하기로 유명하여 아침 닭 울 때에 일어나 길쌈하기와 바느질하기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래 몇십 년 동안을 하루도 거름이 없이 부지런하며 일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농촌 여자의 힘으로 1만여 원의 재산을 모았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드문 일이오, 김 씨가 그것을 모으기에 얼마나 부지런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김 씨가 그렇게 애를 써 모은 돈은 결단코 내 한 몸의 안락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혹 교육 사업에 혹은 심히 가난한 이를 구하는 데 그 돈을 쓰기를 아끼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다음 날에는 가난한 아동 교육을 위해 지역 사회가 학원 운영의 자립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담긴 기사가 실렸다. “경기도 안성 읍내 안청학원은 무산(無産) 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안성청년회에서 설립한 것이다. 설립 이래 2개 성상(星霜·한 해 동안의 세월)에 허다한 난관을 겪어 가며 다수한 무산 아동을 교육하였다. 교실 문제로 일시 휴학까지 하게 되었으나 안성청년회의 부단의 노력으로 현재 안성보통학교 교실을 차수(借受)하여 야학으로 교수함에 생도가 일증(日增)하여 현재 남자 87명, 여자 42명 합계 129명에 달한다. 그곳 유지 제씨(諸氏·여러 사람)로부터 후원회를 조직하고 교실 건축을 계획한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이다. 이번 안성부업장려회가 ‘종래 동회(同會)에서 안청학원에 대하여 매월 10원씩 연조(捐助·자기 재물을 내서 남을 도움)하던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하여 동회에서 분말 잉크를 실비(實費)로써 안청학원에 제공하기로 하였다. 학원에서는 간사 김창배 씨가 6월부터 3개월간 예정으로 전조선 각지를 순회하며 분말 잉크를 판매하여 안청학원의 경비를 보조할 터이라는데, 이에 대하여 안성 기자단에서는 무산 아동 교육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의하였다더라.”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