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16) 뮤지션 김광석의 ‘요절’ 앞과 뒤 <상>
김민기 만난뒤 ‘노찾사’ 합류… 이후엔 ‘동물원’으로 활동도
소극장 1000회 공연… 서글프면서 우렁찬 음색 좌중 압도
음반 4장· ‘다시 부르기’ 2장… 대중·평론가 모두에게 ‘호평’
활발한 방송활동과 5집 준비 중 자택 계단서 숨진 채 발견
유서 없고, 아내도 횡설수설… 타살 가능성 등 의문만 증폭
광석이 형!
가수 김광석(1964∼1996)을 이렇게 부르는 이들을 많이 봤다. 윤도현처럼 그와 교우했던 음악계 후배들뿐만 아니라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 중에도 있다. 자신의 삶에 그의 노래가 동행해 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꼭 내미는 말이 있다. “나도 김광석 공연을 두 번 본 적이 있다”라고. 그중 한 번은 1980년대 중반 서울 어느 대학에서 열렸던 민주화 염원 음악제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김광석이 나와 ‘광야에서’와 ‘녹두꽃’을 불렀다. 서글픈 정조가 배어 있는 음색인데 절정에서 시원하게 내지르는 가창이 매혹적이었다. 그가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과 함께 이른바 민중 가수 활동을 할 때였다.
또 한 번은 1990년대 초반 서울 덕수궁 옆 마당세실극장 콘서트에서였다. 김광석이 그룹 ‘동물원’ 활동을 하다가 독립해 솔로 활동을 할 때였다. ‘기다려줘’ ‘너에게’ 등이 수록된 솔로 1집 앨범(1989)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사랑했지만’ ‘그날들’을 담은 2집(1991)이 큰 사랑을 받은 덕분에 인기 가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방송 출연뿐만 아니라 소극장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겼다. 세실극장에서 본 그는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반주를 곁들인 노래로 객석을 들었다 놨다 했다. 당시 불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였던 만큼 입담도 좋았다. 노래 중간에 유머를 툭 던져 놓고 특유의 하회탈 얼굴을 하며 씩 웃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김민기 만나 ‘노찾사’ 합류
김광석은 생전 워낙 많은 콘서트를 했기에 ‘또 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8월 11일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에서 1000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5년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공연해야 가능한 수치다. 노래 부르는 것 자체를 좋아해서 늘 흥얼거렸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 증언이다.
그는 경희중, 대광고 시절에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성가대와 합창단에서 활동했다. 그런 사람이 예술대학 음악학과가 아닌 명지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던 것은 착한 품성 탓이다. 부모가 평범한 직업을 원하는 데다가 집안 형편이 가난했기에 돈을 버는 직업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하는 기질을 어쩌지 못해 공부를 소홀히 하고, 라이브카페 공연과 대학 노래패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뮤지션이자 공연 연출가였던 고 김민기(1951∼2024). 김광석은 김민기가 꾸렸던 극장 학전의 동요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노찾사’에 합류했다.
그가 노찾사를 거쳐서 ‘동물원’ 활동을 한 것에는 선배 김창완(1954∼)의 역할이 있었다. 나무위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광석과 신촌 등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는 6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만들어 친구들끼리 기념품 삼아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테이프를 듣고 김광석을 포함한 7명을 불러 ‘진짜 음반을 내자’고 했는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
김창완이 만든 ‘동물원’ 동참
대체로 맞는 내용이지만, 김창완에게 최근 직접 들어 보니 내용이 약간 다르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말 장안의 노래꾼(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신정숙)들을 모아서 ‘꾸러기’를 결성했다. 그때 임지훈의 노래 ‘사랑의 썰물’을 듣고 그 작곡가인 김창기를 만났다. 연세대 의대에 다녔던 김창기(김창완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산울림’ 멤버인 김창훈, 김창익과 달리 형제는 아니다.)가 소개한 연세대·고려대 노래꾼을 모아서 ‘동물원’을 만들었다. “김창기가 프런트맨(Frontman·공연을 이끌며 그룹 이미지를 좌우하는 사람)으로 데려온 게 김광석이었어요. 동물원은 1집 앨범을 낸 후 각자 길을 가더군요.” 멤버들은 그렇게 헤어졌지만, 1집은 ‘거리에서’라는 명곡을 남겼다.
김광석은 생전 4장의 음반과 2장의 ‘다시 부르기’ 모음집을 냈다. 그중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가장 호평을 얻은 것이 1994년에 내놓은 4집이다. 그가 직접 작곡한 ‘일어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담겨 있는 앨범이다. 이듬해 펴낸 ‘다시 부르기’ 2집도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 등 한국 포크 음악 계보를 정리한 음반이었다. 이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넓이를 보여 주는 작업이었다. 김민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김광석의 친형 김광복 씨도 이번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미덕을 강조했다. 6세 위 형으로 세무사인 광복 씨는 동생의 음악 활동을 후원했고, 사후 추모 작업에도 앞장서 왔다.
“광석이는 내 노래, 남의 노래 안 가리고 불렀어요. 노래 자체를 좋아하고, 그걸로 삶을 이야기했던 사람이지요.”
김광석은 공연과 방송 활동을 하며 5집을 준비하고 있던 1996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월 5일 HBS 방송 프로그램 ‘겨울나기’에 출연해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을 부른 것이 공개석상에 나타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서울 홍익대 앞 자택으로 갔다가 밤 10시쯤 집을 나서 근처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당시 아내였던 서해순 씨 증언에 의하면, 김광석은 친구와 헤어진 후 귀가해 거실에서 서 씨와도 맥주를 마셨다. 그런 다음 평소처럼 음악을 들으러 갔고, 서 씨는 자기 방에 들어가 잤다.
그랬던 그가 1월 6일 새벽에 자택 계단에서 비스듬히 기대어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경찰, 검찰의 수사와 부검 결과, 김광석이 전선으로 목을 매어 스스로 세상을 마감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세상의 인정을 받으며 그 전날까지도 방송 활동을 하고 새 음반에 대해 이야기했던 뮤지션이 도대체 왜? 평소 메모광이었던 김광석이 유서도 없이 스스로…? 이런 의문이 문화계 안팎에서 솟아났다.
아내 서 씨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횡설수설함으로써 이 의문은 증폭됐다. “부모님 놔두고, 친구들 다 놔두고, 그냥 실수예요. 그냥 술 먹고 장난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김광석의 선택이 아니라 사고였다고 생각하게 할 발언이었다. 서 씨는 훗날 “그때 스물아홉 살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겪고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라고 했다.
딸 10년 전 사망 왜 숨겨?
공식 수사와 부검 결과에 따라 세상의 의문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사망 21주기 해인 2017년이었다.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 개봉되면서부터였다. 영화 ‘김광석’은 고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타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서 씨의 언행이 미심쩍다는 것도 부각했다.
이때 딸 김서연 양이 10년 전인 2007년에 사망했으나, 서 씨가 이를 숨겼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서연 양은 가부키증후군을 앓아 발달 장애 등을 겪었고, 김광석은 생전 이를 무척 가슴 아파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서연 양에 대해 김광석 지인들이 물어보면 서 씨는 “잘 있다”고 대답했는데, 이미 오래전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며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편에 계속>
독특한 음색·짙은 여운… ‘인생과 동행’하는 노래
■ 왜 아직도 김광석인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 노래 ‘이등병의 편지’를 듣던 북한군 중사 오경필(송강호)이 이렇게 말한다. “오마니 생각나는구먼.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잔만 하자우.”
지상에 만 32년을 머물렀던 가객 김광석. 그가 떠난 지 올해로 30년이 된다. (인터넷의 일부 기록은 그의 출생일을 1963년 12월 12일, 타계일은 1996년 1월 6일로 적고 있다. 그의 형 김광복 씨에 따르면, 여기서 출생일은 음력 기록이다. 타계일처럼 양력으로 하면 1964년 1월 22일로 적어야 한다.)
그는 세대를 뛰어넘어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션으로 꼽힌다.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이 불린다. 그 까닭은 무얼까.
으뜸의 이유는 김광석의 음색에 짙게 밴 서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발성 테크닉이 뛰어나진 않았다. 입을 작게 벌리고 목을 잡는 소리를 내는 까닭이었다. 박자 감각도 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노래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목소리는 쓸쓸하면서도 감미롭고, 웅크리다가도 폭발한다. 울림의 여운은 깊고 넓었다. 그가 기존 발성법에 의존하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가창법을 만들어 냈다는 시각도 있다. 그 독특한 음색의 서정은 인공지능(AI) 시대에 더 귀하게 사람들을 공명시키고 있다.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 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 친구 박학기의 말처럼 그의 노래는 우리네 삶의 흐름과 동행한다.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 ‘사랑이라는 이유로’, 군 입대를 앞두곤 ‘이등병의 편지’, 세월의 흐름을 인식할 땐 ‘서른 즈음에’, 정의감에 불탔던 시절이 그리우면 ‘광야에서’, 실의에 빠졌을 때 ‘일어나’, 삶의 황혼기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의 노래가 우리 곁을 지켜 준다.
생전 그가 보여 줬던 인간적 면모에 대한 증언도 팬들의 호감을 지속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형제 중 막내였는데, 집안의 웃음 메이커였다. 유머러스하고 가식이 없었으며 배려심이 깊었다.”(형 김광복) “신인 시절 광석이 형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할 때 대기실에 놓여 있던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다음엔 ‘도현이 거’라고 적힌 치킨 상자가 놓여 있더라.”(가수 윤도현)
류근 시인은 김광석과의 만남을 되돌아보며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쩐지 늘 웃는 표정 뒤에 슬픔이 깔려 있었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라고 했다. 문화일보 신춘문예 출신인 류 시인은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썼다. 그는 김광석의 시정(詩情)을 높이 샀다. “일부러 쓰인 가사보다 시 본연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가수였던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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