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전 서울대 교수
최근 들어 ‘동네 사랑방’ 결합한
공동체 중심 새로운 책방 출현
서점마다 다른 큐레이션 눈길
이젠 서점주 지혜·안목에 감사
여행 갈 때마다 지역 책방 들러
한 권 사며 ‘서점 지키기’ 일조
2020년대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불과 몇 년 전인 2010년대가 어느덧 과거 역사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2010년대는 누가 뭐래도 사회관계망(SNS)의 시대였다. SNS가 등장하자마자 곧 일상의 매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2010년대’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스마트폰과 SNS가 먼저 떠오른다.
그에 못지않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동네책방’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대형 체인 서점부터 지역의 오래된 중형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2011년, 14년 만에 고향인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를 찾았을 때 반스&노블에 못지않게 규모가 컸던, 앤아버에서 출발한 대형 체인 서점 보더스의 부도 소식을 들었다. 이럴 수가! 1971년 동네책방으로 시작한 보더스는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나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추억도 많은 장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앤아버에서 자란 사람은 거의 다 비슷할 것이다. 입구 바로 바깥에 놓인 이동식 매대에 할인 도서를 진열해 둔 모습은 앤아버 도시 풍경의 대표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앤아버를 떠났지만, 그 뒤로도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갈 때마다 보더스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1994년에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가깝긴 했지만 훨씬 더 큰 매장으로 확장 이전했다. 확장 이전하면서 이동식 매대가 없어져서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보더스는 여전히 앤아버의 자부심이었다. 보더스는 미국 전역으로 지점을 확장하고, 심지어 영국까지 진출할 만큼 대형 체인 서점이 되었다. 비행기를 갈아타던 런던 히스로 공항 터미널 상가에서 보더스를 발견하고는, ‘와∼∼, 앤아버에서 런던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반갑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보더스는 이미 대형 체인 서점의 모양새를 갖췄다. 서점원 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 다른 곳보다 훨씬 전문적인 느낌도 있었다. 본질적으로 책을 파는 공간이었기에 북토크 같은 이벤트보다는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해준다는 영업 철학에 집중하는 특징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 사이 온라인 서점이 커졌고, 전자책을 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기존 책방 가운데 상당수가, 크거나 작거나 간에 새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보더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동네책방들은 다 사라지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책방들이 폐업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한쪽에서 새로운 동네책방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책방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동네책방이 돌아왔다”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동네책방이 새출발을 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다양한 책을 파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책을 통한 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크고 작은 단발성 이벤트보다는 북클럽이나 책을 중심으로 한 소모임을 꾸준히 하면서 단골손님의 주문을 해결해 주는 데도 열심이다. 클럽과 동네 사랑방을 결합한 공간인 셈인데, 이런 역할을 잘하는 책방일수록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명소가 된다.
보더스에서 자란 나는 이런 책방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책방은 책이 많아야 하고, 그 속에서 우연한 발견도 있어야 했다. 책방은 사교의 장소라기보다는 조용히 혼자 책을 읽으면서 꿈을 꿀 수 있는 장소라고 여긴 내게 책방은 곧 옛날의 보더스였다.
동네책방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 202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내심 책방에 책이 없다고 여겼지만 차츰 책방에 진열해 둔 책의 선정 기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 경험한, 깊고 넓은 바다처럼 다양한 책이 많던 보더스의 책꽂이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했던 것처럼, 공간의 규모는 작아도 뜻밖의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책은 내가 알아서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책방의 큐레이션은 필요 없는 장식이라고 여기기도 했는데, 10년 만에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고, 이제는 서점주의 지혜와 안목을 고맙게 또는 반갑게 여기고 있다.
책방이 만들어내는 공동체는 더 감탄스럽다. 오랫동안 책방은 주로 혼자서 책을 살피는 공간이라고 여겼는데, 동네책방을 매개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통해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책방 주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서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연결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시간을 내서 작은 책방을 찾는 독자들의 모습도 아름답다. SNS 시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공간은 더욱 소중하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동네책방에 빠지게 됐다. 낯선 곳에 가면 책방을 찾아 들르는 것이 첫 일과이다. 책방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다. 그때마다 보더스가 떠오른다. 보더스가 책방의 기준이라는 뜻이 아니다. 어린 시절 자주 다닌 보더스가 결국 경영난 때문에 문을 닫은 것처럼, 지금 내가 들른 이 책방이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책을 사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동네책방에 가면 반드시 책 한 권을 사기로 결심했다. 마음에 드는 책방에서 책을 사서 결제하는 그 순간, 나는 오늘도 책방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는 무한한 보람을 느낀다. 이 또한 매우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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