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기존 보수집회의 문법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이른바 ‘광화문 아스팔트 우파’로 대변되던 강경 보수세력의 전유물이었던 시위 현장에 20·30대 청년층이 대거 유입되면서다. 이들은 극우의 상징으로 굳어진 ‘성조기’를 배격하고, ‘부정선거론’ 대신 선거관리위원회의 실책과 ‘참정권 훼손’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성세대와 뚜렷한 선을 긋고 있다.
7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오후 4시 기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는 경찰 추산 약 1만3300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구 구성이다. 서울시 실시간도시데이터에 따르면 해당 시간대 올림픽공원 내 인구(최소 2만6000~2만8000명) 중 20대(24.7%)와 30대(25%)가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6·3 지방선거 당일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불거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 초기만 해도, 현장은 보수 정치인과 극우 유튜버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규탄’의 장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100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투표함을 개표소로 이송한 뒤, 시위의 주축은 급격히 청년층으로 옮겨갔다.
시위 양상도 확연히 달라졌다. 지도부가 인원을 동원하는 기성 집회와 달리, 시간대에 따라 인원이 유동적으로 변하는 ‘게릴라식 자발적 참여’가 두드러진다. 특히 현장에서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성조기 자제령’이 확산했다. “미국과 무관한 사안에 다른 나라 국기를 흔드는 것은 대중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피켓 문구 역시 강경 보수의 단골 소재인 ‘부정선거론’이나 ‘혐중(嫌中) 몰이’ 대신, ‘재선거’, ‘참정권 침해’, ‘애국가’ 등 대중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구호로 정제됐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파적 주장이나 정치적 구호를 배격하려는 태도는 현명한 전략”이라며 “운동의 순수성을 유지해 좌우 진영을 넘어선 시민 참여를 끌어내고, 동시에 극우세력과 거리를 둘 수 있느냐가 이번 시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명확한 주최자가 없는 이번 시위에서는 청년층 특유의 자율성이 돋보인다. 보수단체가 매주 광화문에서 주최하는 집회에 등장하는 ‘대량 인쇄 피켓’이나 ‘대형 무대’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직접 손으로 쓴 피켓이 거리를 메웠고, 과거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국면 당시 ‘반탄집회’에서 엿보였던 ‘기부 문화(카페 선결제, 간식차, 보조배터리 지원 등)’가 부활했다.
SNS상에서는 올림픽공원역 인근에서 성조기를 판매하려는 상인을 청년 참가자들이 제지하는 모습이 공유되며 “여기는 광화문이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에 기성 강경 보수세력은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 성조기를 든 일부 고령층 참가자들은 청년들의 제지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주최자도 없는데 무슨 권한으로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통제하느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마찰을 빚고 있다.
참가자들 내부에서는 “끝까지 평화를 지키자”, “경찰과의 마찰에 대응하지 말자”는 지침이 공유되며 시위 초기 경찰을 향했던 적대감도 다소 누그러진 상태다. 현재 경찰 역시 무력 대응을 자제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만, 강경 보수 성향의 일부 참가자들이 동원된 경찰관을 향해 ‘중국 경찰’이라 매도하며 관등성명을 요구하는 등 맹목적인 혐오 프레임의 잔재는 여전히 현장의 불안요소로 남아 있다. ‘참정권 수호’라는 본질을 쥐고 극우와 결별을 선언한 2030의 새로운 보수시위 실험이 기성세대의 낡은 이념 투쟁을 넘어 시민사회의 보편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승주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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