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투표용지가 없어 투표하지 못했다.’ 사고 진상조사 보고서의 한 문장이 아니다. 국민의 주권 행사가 투표소에서 차단당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2030 청년들이 분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특정 정당의 승패보다 “정해진 시간에 투표소에 갔는데 왜 내 표를 행사할 수 없었느냐”고 묻는다. 수능장에 시험지가 없었다는 비유가 나올 만하다. 절차의 실패는 단순 행정 착오가 아니라, 국가가 주권 행사를 보장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실패다.

이 항변을 곧장 극우화나 음모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일이다. 물론 부정선거론에 편승하려는 세력은 있다. 부실한 선거관리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극우 운동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경계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울 잠실 집회에서 정치 구호와 특정 깃발을 밀어내려는 자정이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분노의 실체와 남용은 구별해야 한다. 분노는 인정하되, 음모론과 정치적 약탈은 차단해야 한다.

해법은 세 가지다. 첫째, 진상을 끝까지 밝혀야 한다. 어느 투표소에서 몇 명이 투표하지 못했는지, 투표용지 수량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산정했는지, 보고와 비상 공급은 왜 늦었는지 공개해야 한다. 선관위의 사과는 출발점일 뿐이다. 독립 조사 기구나 국회 조사를 거쳐 책임자를 특정하고, 징계와 피해 구제 기준까지 내놔야 한다. 투명성 없는 사과는 다음 실패의 예고편이다.

둘째, 재투표는 구호가 아니라 법으로 판단해야 한다. 공직선거법 제198조는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경우 재투표를 규정하면서도,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없다고 인정되면 실시하지 않을 수 있게 한다. 전면 재선거냐, 전면 묵살이냐의 양극단은 모두 옳지 않다. 선거구와 투표소별 미투표 규모, 당락 영향 가능성을 따져서 결정해야 한다. 법 앞의 엄정함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셋째, 선거관리 행정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투표용지는 여분이 두려워 빠듯하게 찍어도 되는 물품이 아니다. 앞으로는 예상 투표율을 웃도는 예비 물량, 권역별 긴급 공급망, 실시간 재고 확인 체계, 현장 책임자의 즉시 발행 권한, 사후 감사 기록을 제도화해야 한다. 선거관리 행정의 첫 원칙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권리 보장이어야 한다.

정치권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청년의 분노를 선거 패배 책임 회피의 방패로 삼지 말고, 불편한 목소리를 극우 딱지로 봉인하지 말아야 한다. 유튜버의 조롱과 선동을 방치하는 침묵도 공범이다. 청년들이 요구하는 것은 승자의 교체가 아니라 규칙의 복구다.

더 큰 맥락도 있다. 청년들은 취업·주거·병역·성별 갈등 속에서 공정한 규칙을 요구해 왔다. 국가는 늘 경쟁하라 했지만, 최소한의 경기장 관리마저 실패했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청년을 훈계할 게 아니라 선거관리 개혁에 참여시켜야 한다. 청년정책도 표심(票心) 관리 아닌 생애 설계 회복으로 바뀌어야 한다.

투표는 시민이 국가를 세우는 행위다. 그 행위가 봉쇄당한 날의 분노는 이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인이 아니라 수리(修理)다. 망가진 제도를 고치고, 빼앗긴 권리에 가능한 보상을 하며, 다시는 투표용지가 없어 되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2030을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다시 세우는 길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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