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타이드, 사상의 썰물과 밀물 - (13) ‘정치 윤리’의 함정

 

실체없는 ‘진심 정치’, 포퓰리즘·팬덤과 맞닿아

‘얼마나 본질에 충실한가’ 따지며 상품처럼 소비

자기연출·통제 역설… 말·행동 불일치땐 배신감

정치철학자 스트라우스·아도르노 “현실을 봐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6·3 지방선거가 많은 과제를 남기며 마무리됐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6개 광역자치단체장 중 12곳을 차지해 승리한 모양새이지만, 서울시장을 국민의힘에 내주면서 절묘한 ‘민심의 경고’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 정치에서 사람들은 정책보다 태도를 먼저 본다. 공약의 실현 가능성보다 “저 사람이 진심인가”를 묻고, 통계와 제도보다 “누가 더 진짜인가”를 따진다. 현대 정치를 바라보는 눈이 객관적 사실 판단에서 점차 ‘진정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량평가의 ‘정치 공학’ 대신 정성평가의 ‘정치 윤리’를 더 중요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진정성 중심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성이란 말과 행동이 내면과 일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파생된 ‘진정성 정치’는 정치인의 정책 능력이나 제도적 비전보다, 얼마나 자신의 본질과 감정에 충실한가를 중심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포퓰리즘, 민족주의, 팬덤 정치, 정체성 정치 역시 이 구조와 깊이 연결된다. 정체성 정치는 “나를 진짜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팬덤 정치는 “누가 진짜 우리 편인가”를 가려낸다.

이 같은 현상을 경고한 인물이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다. 스트라우스의 ‘자연권과 역사’를 따라가면, 근대 정치사상은 크게 두 흐름의 긴장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고전적 자연권과 계몽주의의 전통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후고 그로티우스, 존 로크로 이어지는 사상가들은 자연에 따른 보편적 정의를 신뢰했다. 이들은 인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신이나 자연이 부여한 객관적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낭만주의와 상대주의 전통이다. 그 출발점에는 루소가 있다. 계몽주의자이며 동시에 반계몽주의자였던 루소는 인간 이성의 객관성을 비판한 양면적 사상가였다. 문명에 물들지 않은 ‘고귀한 야만인’처럼, 루소는 이성적 제도 설계보다 인간 내면의 진정한 자아와 본래의 삶으로 회복하는 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고 보았다. 니체를 거치며 이러한 경향은 보편 규범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으로까지 이어진다.

스트라우스는 근대 정치의 위기가 ‘자연’에서 도출되는 보편적 정의를 포기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낭만주의는 이러한 보편성 대신 ‘역사적·감정적·개별적’ 기준을 택한다.

만약 형식적 민주주의와 제도정치가 더 이상 ‘좋은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법과 절차보다 ‘잃어버린 순수성’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 역시 객관적 제도 설계보다 ‘진짜’ 민중과 공동체를 복원하는 문제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도르노는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진정성의 은어’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식 존재론이 말하는 ‘본래적 삶’의 회귀를 일종의 허상으로 규정했다.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언어는 실제로는 불안한 현대인이 기대는 환상에 가깝고, 때로는 파시즘과 결합하기 쉽다는 위험성을 고발했다. 나치즘이 “피와 뿌리” “조상의 땅” 같은 언어를 통해 공동체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도르노가 주목한 진정성의 다른 측면은 소비 상품화다. 현대 자본주의는 “진짜 네가 되라”는 구호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을 진정한 자유라 믿지만, 실상 그 과정은 치열한 경쟁과 부단한 자기관리, 그리고 치밀한 자기연출이라는 시장의 압박 속에서 이미 규격화되어 있다. 진정성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주도면밀한 통제 속에 갇힌다. 해방의 언어라는 탈을 쓴 진정성 담론은, 끊임없는 자기 증명을 압박하며 개인을 억압하는 역설적 메커니즘이다.

정치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순수성과 진심을 증명해야 하고, 대중은 정치인을 하나의 이미지 상품처럼 소비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의 불일치, 이미지 관리의 흔적이 드러나는 순간 소비자는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불신은 정치 전체의 가치 담론 자체를 위선으로 간주하는 냉소주의로 확산된다.

결국 스트라우스와 아도르노 모두 지도자의 진심 여부보다 사회경제적 현실과 객관적 조건이 정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는 점점 그 반대로 움직인다.

대표적인 예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를 둘러싼 논란이다. 그는 2023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평화를 위한 협상에 대한 호소’를 발표했다. 그는 서유럽 공론장이 서방 국가들의 무기 지원과 ‘전쟁 승리’ 담론 쪽으로 경직되면서, 평화 협상에 대한 논의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핵보유국과의 전쟁은 어디까지를 목표로 할지 묻는 현실주의적 취지였다. 하지만 논쟁은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정서적 비난으로 흘러갔다. 그를 ‘푸틴 동조자’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공론장이 ‘무엇이 사실인가’의 문제보다, 누가 얼마나 올바른 감정과 도덕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먼저 심판하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시 ‘도널드 트럼프 현상’을 분석하며, 그의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오히려 지지자들에게는 ‘가공되지 않은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정책의 논리성보다 “저 사람은 꾸미지 않는다”는 인상이 더 역설적으로 강력한 정치 자산이 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87년 체제’ 이후의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핵심 윤리 가운데 하나로 ‘진정성의 레짐’을 제시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의 도덕성과 순수성이 정치적·문화적 정당성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했고, 사람들은 “진정한 나”와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려 했다.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이러한 진정성의 윤리는 점차 쇠퇴하고, 생존주의와 속물성(snobism), 자기계발과 재테크 중심의 가치관이 부상했다.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는 이러한 시대 변화의 상징처럼 자주 언급된다. 오히려 냉소주의와 경쟁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자, 사람들은 다시 ‘가짜가 아닌 진짜’를 갈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진정성은 민주화 세대의 공적 윤리나 집단적 이상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 솔직함, 꾸밈없는 태도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귀환했다.

본인을 탐욕스럽고 무능하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없다. 모두가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세상은 갈수록 진정성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까. 어쩌면 문제는 진정성을 향한 우리의 욕망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성을 갈망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더 왜곡된 방식으로 소비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감지되지만,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명확하게 증명되기 어렵다. 실체는 불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짜 같은 사람’을 원한다. 우리는 흔히 사실을 두고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더 ‘진심으로 말하는가’를 두고 경쟁한다. 정책의 실효성보다 진심(sincerity)과 인상이 중요해지고, 현실에 대한 분석보다 감정이입이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

결국 오늘의 정치는 이렇게 작동한다. 먼저 누가 우상인지 고르고, 다음으로 누가 우리 편인지 가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단 하나의 질문만 남는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고 말하는가.” 사람들은 결국 그 질문에 “그렇다”고 느껴지는 쪽을 선택한다.

“효율주의가 권위주의 지도자 낳아”

■ 두 사상가의 문제의식

레오 스트라우스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모두 나치 시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지식인이었다. 스트라우스는 미국 이민 이후 고전적 덕성과 자연권 전통의 복원을 강조했고, 아도르노는 후기 자본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를 생산한다고 비판했다. 파시즘 시대의 경험은 두 사상가의 문제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진정성 역시 본래는 민주주의 정치의 산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핵심 요소를 로고스·에토스·파토스로 구분했다. 로고스는 논리와 사실에 근거한 설득이며, 에토스는 인격과 품성에 대한 신뢰, 파토스는 감정에 호소하는 설득이다. 진정성은 에토스 개념과 겹친다. 찰스 테일러와 마이클 샌델은 에토스를 평판 관리라는 좁은 의미에서 확장한다. 진정성은 공동체가 ‘좋은 삶’을 규정하고 구현하기 위한 시민윤리를 상호 숙의하는 과정이란 주장이다. 다소 낙관적이다.

스트라우스는 이를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그는 현대 정치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을 버리고, ‘무엇이 효과적인가’라는 기술적 질문으로 축소됐다고 규정했다. 공동선과 진리에 대한 숙의 대신 감정 동원과 이미지 정치, 자기표현이 중심이 될 경우, 정치는 상대주의와 니힐리즘 속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대중감정 정치에 취약해진다. 진정성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순간 객관적 선과 진리의 기준은 흔들린다. 진정성은 어디까지나 태도의 문제이지, 진리 자체를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보다 어두운 예언을 제시한다. 냉소적 효율주의와 권위주의는 진정성 정치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체계의 양면이다. “어차피 모두 위선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피로를 느낀 시민들은 공적 토론과 숙의보다 성과와 문제 해결 능력만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민주주의 시민은 더 이상 공적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 서비스를 평가하는 소비자로 변한다. 정치는 공동선을 둘러싼 논쟁의 장이 아니라 누가 더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는지를 겨루는 경쟁으로 축소된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주의가 권위주의 정치와 쉽게 결합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끊임없이 ‘진정한 자기’를 요구하는 사회일수록, 그 피로와 환멸은 역설적으로 냉소주의와 강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비효율적인 갈등 조정보다는 신속한 결단이 강조된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복잡한 논쟁은 그만두고 결과를 내겠다”는 메시지로 지지를 확대해 왔다.

스트라우스와 아도르노는 청년기에 조국을 떠나며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 정치의 소비자화, 그리고 효율과 결단을 앞세운 권위주의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목격했다. 오늘날의 현상 역시 민주주의가 반복해서 마주하는 오래된 위기의 또 다른 형태인지도 모른다.

■ 참고

레오 스트라우스 (1899∼1973)

독일 태생의 유대계 정치철학자.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고대 철학과 자연권 전통을 통해 현대 정치의 위기를 분석했다. ‘자연권과 역사’에서 그는 근대 이후 보편적 정의 대신 역사·문화·시대정신만 남으면서 정치가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로 기울었다고 비판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1903∼1969)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다. 나치 시대 미국으로 망명해 파시즘·대중문화·권위주의를 연구했다. ‘진정성의 은어’에서 그는 “진짜 삶” “본래적 자아” 같은 진정성 언어가 현실의 사회문제를 은폐하고 기존질서에 대한 순응과 권위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강보한 기자
강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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