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날레
수전 구바 지음 |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아흔 앞두고 미술 거장 된 ‘거미여인’, 환갑에 새 문체 개척한 시인
20대 청년 통해 영감얻은 작가 등 고령에 빛본 여성예술가 조명
오랜 세월 축적해온 ‘자아’ 활용… 자신만의 기개와 열정 쏟아내
“늙은 두꺼비처럼 흉측해진” 노년의 얼굴을 스스로 풍자하며 엘리트 시인에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여성,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수m 높이의 거미 조각상들을 만들어 미술계 거장이 된 여성, 60대에 연하의 시인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말년에는 반항적 에로티시즘 소설을 쏟아낸 여성….
이런 모습의 ‘나이 든, 여성, 예술가’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대중의 찬사가 젊고 재능있는 남성 예술가들에게 집중된 시기, 이들의 삶은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을 통해 페미니즘 비평의 문을 연 수전 구바는 최근작에서 바로 이들을 조명한다. 죽음을 바라볼 나이에 욕망을 발산하고,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생존했던 여성들의 기록이다.
먼저, 저자는 여성 예술가들의 창작을 방해하는 노년기 정신적·신체적 장애물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질병에 시달리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커지며, 때로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다. 그렇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누군가는 노화에 굴복하는 대신 적응하고,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축적된 자아를 활용해 자신의 ‘기개’를 펼쳐왔다는 점이다. 책에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는 부제가 달린 것도 이 때문.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에게 노년기는 오히려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 ‘거미 여인’으로 불리는 그가 수m 높이의 거대 거미 구조물인 ‘마망’을 만든 것은 아흔을 앞둔 때였다. 62개의 셀로 구성된 설치미술 연작 ‘셀 시리즈’를 시작한 것도 80대가 되면서부터다. 젊은 시절 부모의 사망으로 우울증에 걸리고, 이후 뉴욕에서 아들 셋을 키우면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부르주아. 공백기 동안 정신분석에 매달렸던 그는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외도 등 과거의 트라우마를 물질화하는 작업에 맹렬히 매달렸다. 70대엔 분노와 고통이 밴 작업이 주를 이뤘다면, 80대에는 이를 치유하는 작업으로 나아갔고, 자신의 노년을 작품의 주제로 활용하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강인함과 연약함이 한데 담긴 거대한 거미는 부르주아의 어머니를 기리는 애도이자 “늙은 여자 예술가의 초상”이다.
실험적 모더니즘의 엘리트 시인에서 노인이 된 후 TV 광고에 등장하는 아이콘으로 변모한 메리앤 무어(1887∼1972)의 사례는 어떤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족과 강력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60세 어머니의 사망으로 모든 창작과 생의 기력을 잃은 듯 보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추모하며 헌정한 ‘시 모음집’이 전미도서상, 퓰리처상 수상 등 뜻하지 않은 성공으로 이어지며 그의 말년을 완전히 뒤바꿨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이전과 달리 ‘단순명료한 글’을 쓰고, 일부러 자신을 “늙은 두꺼비나 허수아비”로 희화화해 ‘엉뚱한 할머니’ 역할을 도맡았다. 노년의 삶이 오히려 더 풍성해진 그는 스포츠 행사와 잡지 표지, 항공사의 TV 광고에도 등장했다.
나이 든 여성 예술가들은 젊은 남성과의 연애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창작하거나, 후배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며 작품의 생명력을 이어가기도 했다. 고령의 이들에게는 세상과의 연결감이 창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됐기 때문이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80대의 나이에 20대 도예가 청년의 멘토임을 자처하고, 동시의 그의 간호를 받으며 회화 창작에 몰두했다. 그 결과,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네 점의 유화 걸작들을 완성했다. 60대에 연하의 애인과 독특한 관계를 맺었던 이자크 디네센(1885∼1962)은 말년의 소설에서 여성의 무법적 욕망과 에로티시즘을 선보여 독창적 세계를 구축했다. 이뿐만일까. 국제적인 무용가였다가 말년에 사회 정의를 위해 나서는 활동가가 된 캐서린 더넘(1909∼2006)은 자신의 열정을 오히려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했다.
나이 든 여성 예술가들의 생동감과 대담함은 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은 ‘정규분포 곡선’을 자연의 교리처럼 떠받치고 살아온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자신도 올해 여든한 살이 된 저자는 말한다. “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 스스로 맞이할 노년의 모습을 빚어낸다”고 말이다. 나이 든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헌사가, 곧 우리가 맞을 미래에 대한 찬사로 읽히는 이유다. 592쪽, 3만3000원.
인지현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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