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진 피아니스트,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시간은 뭔가를 가져가는 대신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남겨줘
오랫동안 부족함과 마주하며
묵묵히 길을 가야 성공에 닿아
즉시 대가를 얻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 쌓고 쌓아야 가능
나이가 들수록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된다.”
젊었을 때는 이 말이 답답하게 들렸다. 왜 굳이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책을 읽고, 더 많이 노력하면 더 빨리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정말 중요한 것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되었다. 어릴 때 나는 음악이 실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정확하게 연주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성장해야 했고, 경쟁해야 했으며,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연주자의 손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 사람을 보게 된다. 얼마나 빠르게 연주하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대하는가가 더 궁금해졌다. 결국, 음악은 기술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태도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성공보다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더 큰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는 좋은 가르침이란 정확한 답을 알려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을 만나고 떠나보내면서, 가르침이란 정답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학생보다 스승이 먼저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변화가 더딘 경우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른 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 씨앗이 싹을 틔운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의 힘이 아니라 시간의 힘임을.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처음 부임했을 때, 초대 총장이셨던 고 이강숙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다. “이제부터는 잘하는 것보다 얼마나 버티느냐가 중요하다.” 그때는 그저 경험 많은 인생 선배의 조언 정도로 들렸다. 젊은 시절의 나는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더 빨리 성장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말은 점점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아야 비로소 이해된다. 돌아보면 그 말씀은 예술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는 ‘버틴다’는 말이 다소 소극적으로 들렸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버틴다는 건 단순히 견디는 게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예술가에게도 교육자에게도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도 가장 어려운 일은 특별한 재능을 갖는 게 아니라, 긴 시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화려한 성공은 순간의 박수로 기억되지만, 한 사람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그 박수가 들리지 않는 시간들이다.
나는 정말 많은 콩쿠르를 심사했고,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수상이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가르쳐 준 것은, 한 번의 성공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은 결과이지만, 시간은 사람을 만든다. 오랫동안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한 사람, 실패를 견디며 다시 시작한 사람, 박수를 받지 못하는 시간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결국 더 깊은 음악을 만들어 낸다.
돌아보면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서둘러 확인하려고 한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고, 노력의 대가를 즉시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르쳐 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일수록 천천히 자란다는 사실이다. 신뢰도 그렇고 우정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사람의 품격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태도가 쌓여 한 사람을 만든다.
살며 생각해 보면, 시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주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가져간다. 요즘은 예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린다. 악보에 숨어 있던 음들의 연결과 화성의 움직임, 젊은 시절에는 지나쳤던 음악의 의미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동시에 예전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젊은 시절에는 몰랐던 음악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젊은 시절의 손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때로는 아쉽지만, 이것이 시간의 공평함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무언가를 뺏어 가는 대신, 또 다른 무언가를 건네준다.
사실, 시간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젊음도 체력도 수많은 가능성도 조금씩 사라진다. 그러나 시간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겨 준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사람을 이해하는 시선,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여유를 선물한다. 돌아보면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학교도 책도 무대도 아닌 시간에서 배운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보다 조금 덜 조급해지려고 한다. 시간이 가르쳐 준 것들은 대개 서두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를 조금씩 알아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언제나 시간이라는 가장 조용한 스승을 통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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