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구 문화부장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4박 5일간의 방한에서 변함없이 소탈하고 친화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치맥’ 회동에 이어 이번엔 삼겹살에 ‘소맥’으로 더욱 친근감을 자아냈고, 국내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면서도 중간에 프로야구 시구를 하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폭넓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광폭 행보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그를 상징하는 가죽재킷 패션. 그는 더운 날씨인데도 늘 가죽재킷을 애용했다. 10일 방송된 예능에도 검은 재킷 차림이었다.

같은 색깔과 스타일의 옷만 고집하는 유명인은 꽤 많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검은 터틀넥 셔츠이고, 또 다른 빅테크 거물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도 회색 티셔츠와 후드 티, 청바지를 고수한다.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의 거장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자유분방한 제작 현장에서도 항상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는다. 패셔니스타로 통했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실은 거의 매일 똑같은 스타일의 양복을 입었다.

선택지가 풍부하게 널린 현대사회에서 이들은 왜 굳이 ‘단벌’을 고집할까. 이유는 명확하다. 젠슨 황은 “매일 아침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쓰기 싫어서”다. 그리고 편안한 데다 엔비디아의 혁신적 기업 이미지와도 맞아떨어진다. 저커버그와 놀런 감독도 같은 이유를 꼽는다. “매일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에너지를 쏟는 일은 낭비”라며 “해야 할 결정의 수를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싶다.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는 데 에너지를 쏟다 보면 본업에 전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즉, ‘선택의 피로를 줄이기 위함’이란 뜻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선택의 피로를 느낀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력의 재발견’에서 이를 ‘의사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라고 명명했다. “의지력과 판단력은 쓰면 닳는 배터리와 같아서, 사소한 선택을 줄여야 중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젠슨 황과 잡스, 놀런 감독의 선택은 제한된 정신적 자원을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귀찮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집중력을 지키려는 생존 전략에 가깝다.

현대사회에서 선택의 피로가 가장 극단적 방식으로 표출되는 게 선거다.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일 텐데, 선택의 경로가 많아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특히 이런 문제가 두드러졌다. 후보와 공약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피로감을 느낀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하다시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교육감 선거에서 108만 명의 무효표가 나온 게 이를 방증한다.

의사결정의 피로는 옷장 앞에서만 느끼는 게 아니다. 어디서든 매 순간 우리를 압박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선택의 홍수 시대엔 일부러 선택을 줄이는 게 되레 효율적·주체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젠슨 황의 가죽재킷은 다시 읽힌다. 그건 단순한 편리함뿐 아니라 전략이고 효율이며 자유라는 것. 어쩌면 민주주의의 과제는 더 많은 선택지를 주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단순화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김인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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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구 기자
김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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