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석 정치부 차장

소설만큼이나 엄정한 에세이로 유명한 작가 김훈이 2004년 출간한 산문집 제목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다. 그는 이 책에서 민주당 소속 한 여성 의원이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한 칼럼을 쓴 보수 성향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느 편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목소리를 높인 사건을 거론하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책 출간 이후 22년이 흘렀으나 사상 검증의 레이더를 돌리는 진보 진영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이 본능은 사태가 뜻대로 전개되지 않거나 상대 진영에 공격 빌미를 줄 만한 불리한 국면에서 특히 과격하게 발현된다.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이 6·3 지방선거에서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서울시장 선거 결과의 원인을 ‘2030세대의 극우화’로 단정하며 청년들에게 쏟아낸 극언(極言)을 보라. 유튜브 채널 ‘매불쇼’ 진행자 최욱은 방송에서 극우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를 겨냥해 “이게 양지로 올라오는데 이놈들이 아주 동경하는 게 전두환”이라며 “온라인상에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채널에 출연한 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는 “(2030세대는) 사고의 체계가 없다”며 “합법적인 방식으로 몽둥이를 드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의 발언은 큰 논란을 낳았지만, 청년을 ‘개념 없는 극우’로 낙인찍으려는 시도는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다. 오히려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거리로 뛰쳐나온 2030세대는 극우 세력과 단호히 선 긋고, 참정권 보장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를 내세우며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념에 대한 낙인찍기는 비단 정치 유튜버나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국민의힘이 서울 강남에서 지방선거 승리를 이끈 것을 놓고 SNS에 “시민의 권리 행사가 돈의 질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며 “내란을 일으켜도 상관없는 맹신인가, 맹목인가, 자기기만인가”라는 댓글을 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책임이 없지 않다. 이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투표 포기는 중립이 아니라 내 삶과 공동체를 해치는 그들을 편드는 것’ ‘정치를 포기한 결과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것’ 등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메시지를 연이어 발신했다.

‘진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상을 향한 진취적 기운을 품고 있다. ‘보전하여 지킨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보수’가 안정 지향적인 인상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를 표방하는 것만으로 ‘가치 우위’의 정치적 후광을 얻었던 권위주의 시대가 아니다. 제도적 민주주의에 이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상당 부분 안착한 오늘은 보수·진보가 정책과 비전을 놓고 치열한 수평적 경쟁을 펼쳐야 하는 시대다. 진보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념의 구별 짓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걸음을 내딛고자 하는(進步) 이상적 열망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여당의 열정은 ‘우리 진영’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향해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말에 답이 있다.

나윤석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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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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