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기 워싱턴 특파원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DC 내셔널몰 한복판 잔디밭에 거대한 ‘8647’ 글자가 포착됐다. 지상에서는 그저 잔디 일부가 변색된 듯 보였지만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는 뚜렷하게 8647이란 숫자가 드러났다. 한밤중에 기계로 깎거나 급속도로 잔디에 변화를 가한 게 아니라 화학약품을 살포, 며칠에 걸쳐 서서히 잔디의 색깔이 변하도록 한 방식을 썼기 때문에 CCTV에도 ‘범행 현장’이 포착되지 않았다. 내무부는 이를 ‘미친 반달리즘(Deranged Vandalism)’으로 규정했고, 대통령 경호를 담당하는 비밀경호국(SS)과 연방수사국(FBI)까지 가세해 용의자 추적에 나섰다. 특히, 1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80번째 생일, 다음 달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건에 트럼프 행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8647은 무슨 의미일까. 86은 1930년대 미국 식당·바에서 쓰던 은어로, 특정 메뉴가 품절됐을 때 메뉴판에서 빼거나 ‘진상’ 손님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47대 대통령이라는 점이 더해져 ‘47대 대통령을 (합법적 수단으로) 직에서 물러나게 하자’는 의미가 된다.
8647을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부각시킨 건 정작 트럼프 행정부였다. 지난 4월 트럼프 행정부는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을 대통령 협박 혐의로 기소했는데, 이때 법무부는 코미 전 국장이 약 1년 전인 지난해 5월 SNS에 해변의 조개껍데기를 8647 모양으로 배열한 사진을 게재한 것을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인 신체적 위해 및 암살 선동 행위로 규정하고 문제 삼았다. 코미 전 국장 기소 후 이 숫자는 반(反)트럼프 진영의 ‘저항의 상징’이 됐다. 5월 한 시민단체는 내셔널몰 인근에서 시위 허가를 받고 8647이 적힌 깃발을 게재했는데 이번엔 국립공원관리청(NPS)이 이를 ‘대통령에 대한 위협’이라며 텐트와 깃발 철거를 요구해 법원까지 가게 됐다. 결국, 지난 1일 연방법원은 정부가 구체적 증거 없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려 한다며 시민단체 손을 들어줬다.
2024년 7월 유세 중 습격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을 ‘쫓아낸다’는 식의 표현에 더욱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백악관 대변인실의 데이비스 잉글은 “정치적 폭력이나 암살을 조장하거나 동조하는 이들은 가장 강력한 수준으로 규탄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개껍데기 사진 한 장으로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힌 이를 법정에 세우려 하고, 식당의 은어에 불과했던 숫자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테러 혐의로 바꾸는 현실은 웃지 못할 희극에 가깝다. 물론 공공기물 훼손이나 국가원수에 대한 위협은 엄단해야 할 범죄지만 단순한 풍자마저 암살 선동으로 몰아가는 정권의 과민 반응이 오히려 사태를 키우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과거 식당의 위트 있는 은어였던 숫자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중범죄가 되는 시대가 왔다’고 비꼬았다. 권력이 반대파의 숨소리마저 사법적으로 처단하려 할수록, 저항은 더 은밀하게 진화하기 마련이다. 비판의 언어를 사법의 잣대로 단죄하려 하는 기괴한 워싱턴DC의 풍경은 정치의 사법화와 극단적 정치 양극화의 한국 정치와도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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