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다. 한때는 예능에서 수없이 패러디되며 깔깔댈 수 있을 표현이었지만, 지금 세대에게는 공감도 재미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낯설고 폭력적인 질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에 강아지와 산책하세요” “우리 아버지는 요즘 AI 프로그램 배우고 계세요” 같은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서열주의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질문은 점차 금기시되고 있다.
부모에 대한 질문이 권력과 재력이 아닌 성장과 희로애락의 스토리에 포커싱되어 있다면 어떨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미국에서 발표된 바 있다. 에머리대 심리학과 마셜 듀크와 로빈 피부시 교수가 1990년대부터 진행해온 ‘가족 서사 프로젝트’(Family Narratives Project)가 그것이다.
위기나 스트레스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아이들의 비결을 알아보는 연구를 통해, 가족에 대해 잘 아는 아이들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높고 ‘내적 통제력’(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구팀은 ‘부모님이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알고 있는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에서 자라셨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 가족이 겪은 가장 큰 비극이나 이를 통해 깨닫게 된 점은 무엇인가, 네가 태어났을 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등 가족에 관한 질문의 답을 분석한 결과 3가지 유형의 서사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상승형 서사(Ascending)다. 상승형 서사는 ‘과거에는 가난하고 힘들었으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와 같은 스토리다. 이런 경우는 아이에게 책임감과 함께 나도 성공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하는 긍정적 요인과 실패에 대한 압박감을 준다는 부정적 요인이 공존했다.
두 번째는 반대의 경우인 하강형 서사(Descending)로, ‘예전에는 잘나갔으나 이런저런 원인으로 어느 순간 이렇게 몰락하게 되었다’는 스토리다. 이 경우 아이에게 무력감이나 원망, 패배주의를 심어줄 수 있어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유형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진동형 서사(Oscillating Narrative)다. ‘좋은 일(성공)과 나쁜 일(실패, 비극)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우리 가족은 함께 힘을 합쳐 이겨냈다’라는 스토리로, 그 오르막과 내리막의 진동을 알게 된 아이들은 심리적 강인함을 보였다.
‘사업이 대박 나기도, 큰불로 인해 집을 잃기도, 실직을 겪기도 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 이겨낼 수 있었다’와 같이 진동형 서사가 강한 가족 스토리를 알고 있던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행복감이 가장 높았다. 부모와 가족들이 자주 대화하며 전달된 풍부한 가족의 역사는 아이의 뇌에서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언어 인지 능력과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최고의 학습 도구로 작용한 것이다. 실제로 연구가 진행되는 기간에 발생한 9·11 테러라는 거대한 충격 앞에서도, 여러 세대를 거치며 가족이 겪은 근현대사와 가족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훨씬 더 잘 극복하고 빠르게 일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나 혼자 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느끼면 쉽게 고립감과 무력감에 빠진다. 하지만 진동형 서사를 들으며 자란 경우 혼자가 아니라 안전하고 단단한 무언가, 즉 가족 시스템에 소속돼 있다는 상호세대적 자아(Intergenerational Self)가 생겨 안정감을 갖게 된다. 하강형 서사는 세상의 위험을 과장하고, 상승형 서사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압박을 주는 반면, 진동형 서사는 인생은 원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일어나는 굴곡이라는 삶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지적 재구성이 일어나 특히 스트레스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면서 대처하는 힘을 제공한다.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통제감을 키워갈 수 있게 된다. 가족의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온 경우 이런 대리 통제감이 내재화돼 힘든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극복하는 단단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대단한 재력가이거나 권력가만이 들려줄 수 있는 서사가 아니다. 한 시대를 살며 겪은 소소한 이야기들, 그 순간들을 어떻게 넘겨왔고 지금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라면 충분하다. ‘돈이 없어 온 가족이 밤마다 모여서 부업을 했대’ ‘슬플 땐 다 같이 등산을 했대’와 같은 구체적인 극복 서사가 뇌 속에 위기 대응 매뉴얼인 인지스크립트를 형성하여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다.
부모가 실패했던 경험, 힘들었던 경험 자체를 숨기거나 미화하려 들지 말고, 그 과정과 그 감정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그 고통에서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가 담긴 스토리. 대단한 무용담이 아니어도 된다.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헤쳐 나갈 힘도 생길 거라는 것, 인생의 진동에 흔들리지 않을 힘을 키워 줄 그 스토리가 어쩌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크고 위대한 유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