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기의 K스트리트 - 트럼프 행정부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

 

온라인·우편 대신 실물 신분증 제출해야 유권자 등록 가능

정치권 “연방제 특성상 불가능… 주법과 상충 법정다툼 여지”

이민자 등 참정권 훼손 우려… NYT “민주주의 후퇴” 지적도

워싱턴=민병기 특파원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꼬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트럼프에게는 선거 패배라는 말이 없다. 오직 선거 승리와 부정선거뿐’이라는 말이다. 2021년 의사당 난입·난동 사태도 2020년 대선 패배를 부정선거 탓으로 돌린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슬그머니 ‘부정선거’ 가능성을 언급하며 투표 시 유권자의 신분 확인을 강화하도록 한 ‘투표자격보호법안’(SAVE America Act)을 강조하고 나섰다.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은 ‘미국 시민이 아닌 사람은 투표하면 안 된다’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실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 국가의 특성과 행정의 난맥상과 만날 경우 실행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법안 처리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은 투표 때 유권자 신분증 및 시민권 증명 제시를 의무화하고 군 복무·병·장애·여행 등 분명한 사정을 제외한 경우 우편투표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미국에서 주로 부정선거의 사례로 드는 신분 증명과 우편투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분야는 대표적인 미국 선거제도의 ‘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실제 올해 발표된 오하이오·조지아·유타주 등의 전수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주당 몇 건에서 수십 건 수준의 비시민권자 투표 사례가 확인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뉴욕 등 14개 주와 워싱턴DC에서는 선거 당일 투표소에서 사진이나 이름이 박힌 신분증 없이도 투표할 수 있다. 대체로 민주당 강세 지역인 이들 주는 서명대조법(유권자 등록 때 남긴 서명과 대조), 구두 신원 확인, 법적 선서 등을 거쳐 투표를 일단 하게 한다. 뉴햄프셔 등 일부 주에서는 다른 유권자가 신원을 확인해주는 ‘보증 투표’(Vouching)를 허용한다. 이 같은 ‘허술한’ 신원 증명 방식은 부정선거에 악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미국의 선거 제도를 이해하고 겪은 정치권 관계자들은 이 같은 법안이 실제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법안 통과 시 수정헌법이나 주(州) 법과 충돌, 엄청난 법정 다툼에 휘말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법안은 올해 2월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 통과가 일단 무산된 상태다.

미국 선거 제도는 기본적으로 주 정부가 담당한다. 헌법에 의해 연방정부에 위임되지 않았거나, 각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한은 각 주나 국민에게 유보된다는 수정헌법 10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각 주마다 인구, 행정력, 유권자 분포 등 사정에 따라 투표 방식이 모두 다르게 발전해 정착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처럼 주별로 주먹구구식으로 선거 관리가 이뤄지다 보니 시민권이 없는 사람도 투표하는 부정선거가 횡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의 주민등록제도처럼 전 국민이 중복되지도 배제되지도 않는 고유한 식별 번호가 없는 미국의 특성상 단일한 유권자 명부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다. 여권이 이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지만 초당적정책센터(BPC)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52%는 현재 이름이 적힌 유효한 여권이 없다. 세금을 걷는 근거가 되는 사회보장카드는 미국에 임시 체류하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발급돼 시민권자와 비(非)시민권자의 구분이 어렵다. 운전면허증 역시 주 정부가 관리하는 데다 비시민권자에게도 발급된다.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이 내세우는 게 출생기록이다. 하지만 출생기록은 주 정부가 관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출생기록의 경우 디지털이 아닌 종이 문서나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된 상태다. 더 큰 문제는 기혼여성의 성(last name) 변경이다. 기혼여성의 80%는 결혼 시 배우자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생기록의 성과 달라진 경우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브레넌 정의센터(Brennan Center for Justice)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자 중 여권이나 출생증명서 등 시민권을 즉각 증명할 서류가 없는 유권자가 약 2100만 명(전체 유권자의 11%가량)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 같은 현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세이브 아메리카 법안이 내세운 방식은 ‘완벽한 통합 명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신분 증명을 유권자의 부담으로 돌리겠다는 취지다. 현재 미국인의 94%가 온라인이나 우편 혹은 면허증 갱신 시 자동으로 유권자 등록을 하는데 이를 전면 금지하고 투표를 원할 경우 직접 지역 선관위 사무실을 찾아가 실물 서류(여권이나 귀화증명서, 출생증명서 원본 등)를 제출해야 투표인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 주 정부에는 기존 유권자 명부를 연방정부로 넘기라고 압박하고 있는데, 이를 국토안보부(DHS)의 이민자 검증 시스템(SAVE·Systematic Alien Verification for Entitlements)이라는 데이터베이스와 강제로 대조하겠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 진보성향인 뉴욕타임스(NYT)는 “투표하기 위해 돈을 쓰고 관공서를 찾아가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현대판 인두세(Poll Tax)”라고 비판했다. 국토안보부의 SAVE가 업데이트되는 데 최대 몇 년이 소요돼 시범적으로 기존 명부와 대조했던 앨라배마, 노스캐롤라이나 등 주에서 대규모 오류가 나기도 했다. 시스템상 비시민권자로 분류된 이들 중 94∼98%가 시민권을 정당하게 획득한 ‘진짜 미국 시민’이었다.

NYT 등은 이 법안이 노리는 정치적 효과를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서류 증명이 까다로워지면 주로 이사가 잦은 청년층, 도시 저소득층, 귀화한 이민자 등이 유권자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큰데 이들은 통계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 또 다른 이유는 선거 패배를 대비한 명분쌓기다. 실제 연방 상원에서 이 법안이 최종 부결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이 불법 이민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이 상식적인 법안을 막았다”고 선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법안은 트럼프 지지층에 ‘중간선거 패배 시 완벽한 변명거리’를 선제적으로 제공한다”며 “시스템의 신뢰성을 미리 훼손하는 빌드업”이라고 비판했다.

민병기 특파원
민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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