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난 손자 태오는 어린이집을 하원하면 곧장 놀이터로 달려간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천진하게 논다. 미끄럼을 타다가 그네를 뛰고, 유치원 형님들을 따라 개미도 보며 논다.
같이 놀던 제 친구 지한이가 친한 표시로 자꾸 제 머리카락을 만지자 태오가 불쑥 “불편해!”라고 말했다. 네 살짜리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지한이가 바로 “미안해” 하고 사과한다. 둘은 금세 깔깔거리며 또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닌다. 로프 사다리를 올라갈 때는 먼저 올라간 녀석이 손을 내밀며 “도와줄게. 손잡아!” 하며 서로 끌어준다.
태오는 이래 봬도 어린이집 3년 차 우주반이다. 2년 차 달님반의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조금 딱딱한 공을 가지고 놀다가 던진다는 것이 하필 태오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아픈데도 빨개진 이마를 만지면서 눈물이 글썽한 채 꾹 참고 있다. 제 할머니와 그 아이 엄마가 놀라 달려와 “아프겠다. 어쩌지?”를 연발하니, 녀석이 볼멘소리로 한마디한다. “괜찮아요. 나는 형님이잖아요!” 우주반 형님 체면에 달님반 동생이 실수로 그런 것이니 제가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아팠는지 걱정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더 했다. 처음 어린이집을 갈 때 말 한마디 못 하고 기어다니던 두 살짜리가 언제 저렇게 컸나 싶다. 하루하루 커가는 것이 보기에 참 아깝다.
“불편해!”와 “나는 형님이잖아요!”는 평소 어린이집에서 단체생활을 위해 배운 말일 게다. 여럿이 함께일 때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잘못했으면 바로 사과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또, 싫은 것은 그냥 참지 말고 정확히 싫다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방이 불편해하는 줄을 계속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실수한 것은 윗사람이 의젓하게 감싸주고, 힘든 친구는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어린이집에서 평소에 익힌 이런 단체생활의 가르침이 자기도 모르게 행동으로 나온 것이다.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말이 있다. 묵자(墨子)가 흰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이를 슬퍼했다는 뜻이다. 한 번 물이 든 실은 다시 희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말은 타고난 본바탕이 잘못에 물들어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길 건널 때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으로 손이 올라간다. 그러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슬그머니 손을 내린다. ‘어른들도 안 올리는데 뭐 어때!’ ‘에이 귀찮아!’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이들은 한 번씩 변한다. 지켜야 할 규칙을 무시하고 당연한 질서를 당연치 않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괜찮아요. 나는 형님이잖아요!”가 “괜찮아, 뭐 어때!”로 바뀐다. 아이들이 커간다는 것은 “뭐 어때!”와 “괜찮아!”가 늘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커간다는 것이 그러지 않으면 큰일 날 줄 알고 따르다가, 하지 않아도 괜찮고 규칙을 지키고 따르면 오히려 손해라는 걸 익혀 가는 과정이면 어쩌나 싶다.
지난달에,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1박 2일간 창녕성씨 고택을 다녀왔다. 학술 발표도 하고 저녁에는 즐거운 뒤풀이 자리도 가졌다. 배경과 전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여서 화제가 풍부해 대화가 즐거웠다.
얘기 도중 프랑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젊은 한국인 여교수가 불쑥 말했다. “한국에 오면 프랑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어 압박감을 느껴요.” 우리는 모두 허심탄회하게 간격 없이 공부한다고 생각하던 터여서 그의 이 말에 다들 순간 당황했다. 그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지금도 그래요. 프랑스에서는 70세가 넘은 교수와도 친구처럼 얘기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돼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어 망설이게 돼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려다가 변명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우리가 잘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만 당연시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문화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관계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네 살짜리 손자가 “나는 형님이잖아요!” 하며 보인 인내를 나는 의젓하다고 느꼈는데, 저쪽에서는 한 학급 위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참으라고 가르치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반대로 태오가 공을 차다가 하급반 아이를 다치게 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은 이러면서 알게 모르게 위계를 익혀 간다. 좋은 의미에서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참는 것이지만, 다른 뜻으로는 프랑스 여교수가 말한, 보이지 않는 위계를 내재화하는 지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문화와 교양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집단 내부의 약속이다. 이 약속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방죽 위에서 연못의 물고기를 보며 장자(莊子)가 참 평화롭게 놀고 있다고 감탄하자, 혜시(惠施)가 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진짜 마음을 어찌 아느냐고 타박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하기야 물속 물고기의 깊은 속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괜찮아요. 나는 형님이잖아요!” 이 말에 담긴 위계 의식이 어떻든 아이들이 순수함과 천진함을 잃지 않고, 무심결에 “괜찮아! 뭐 어때”로 넘어가지 않게 만드는 교육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