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미국 워싱턴 DC 워싱턴기념탑에서 내려다본 리플렉팅 풀 전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보수 이후 녹조 확산과 바닥 표면 손상의 원인으로 반달리즘(고의 훼손 행위)을 지목한 뒤 주변에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은 평범한 연못이 아니다. 한 세기 넘게 미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비춰온 무대이자 시민들의 광장 역할을 해온 공간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뜻밖의 이유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가 진행된 뒤 녹조와 바닥 박리 논란 등이 잇따르면서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4일(현지시간) 열리는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의 시작점 역시 이 리플렉팅 풀 일대로 정했다.
◇킹 목사 연설부터 대통령 취임식까지…美 현대사 비춘 ‘민주주의의 거울’= 리플렉팅 풀의 역사는 1902년 수립된 ‘맥밀런 계획(McMillan Pla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워싱턴 기념지구의 기본 골격을 만든 이 도시 계획에 따라 링컨기념관과 워싱턴기념탑 사이에 길이 600m가 넘는 거대한 반사연못이 조성됐다. 링컨기념관 설계자인 헨리 베이컨은 연못을 단순한 수경시설이 아니라 미국의 이상과 민주주의를 비추는 ‘거울’로 설계했다. 물에 비친 기념관과 기념탑이 하나의 풍경을 이루도록 바닥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1923년 개장한 이후 이곳은 곧 워싱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쉼터가 됐다. 겨울이면 연못이 얼어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탔는데 워싱턴포스트(WP)는 1924년 이를 두고 “산타클로스에게 스케이트를 받은 아이들이 실력을 뽐낼 기회”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한때는 최대 2만 명이 이용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바꾸는 방안까지 검토됐을 정도다.
리플렉팅 풀이 미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무대로 자리 잡은 것은 수많은 역사적 순간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1939년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장을 사용하지 못했던 성악가 매리언 앤더슨은 7만5000여 명이 모인 이곳에서 공연하며 인권운동의 상징적 장면을 남겼다. 1963년에는 약 25만 명이 연못 주변을 가득 메운 가운데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무더운 여름날 시민들이 연못에 발을 담근 채 연설을 듣는 모습은 지금도 1960년대 미국 시민권 운동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리플렉팅 풀은 미국 사회의 굵직한 순간마다 빠지지 않았다. 베트남전 반전(反戰) 시위,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 축하 행사, 코로나19 희생자 추모식 등이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연례 기도회와 야외 요가, 조깅, 참전용사 의장대 공연 등 시민들의 일상 역시 이 공간을 채웠다. 1974년에는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은 20대 여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연못 위에 차려진 아침 식사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고, 수십 년 뒤 그 사연이 알려지면서 다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민권 운동의 무대이자 국가적 축제와 추모의 공간,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이 공존한 장소였던 셈이다.
1968년 얼어붙은 리플렉팅 풀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들. AP뉴시스
◇美 독립 250주년 앞두고 트럼프가 손본 반사연못= 하지만 리플렉팅 풀은 영광만큼이나 오랜 골칫거리도 안고 있었다. 수심이 50∼70㎝로 얕은 데다 강한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는 구조 탓에 녹조가 반복적으로 발생했고, 바닥 누수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1920년대 신문에도 녹조 관련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100년 가까이 이어진 고질병이었다. 2010년에는 약 20개월 동안 바닥과 급수시설을 전면 교체하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됐지만 재개장 직후 다시 녹조가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워싱턴 기념지구 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리플렉팅 풀도 손봤다. 그는 이곳을 “더럽고 역겨운 장소”라고 표현하며 바닥을 푸른 ‘아메리칸 플래그 블루(American Flag Blue)’ 색으로 칠하고 수영장용 방수 코팅재를 설치하는 개보수를 지시했다. 당초 2주 내에 200만 달러(약 30억8000만 원)면 끝날 공사라고 장담했지만 공사비는 1600만 달러(약 246억5600만 원)까지 불어났고, 재개장한 지 며칠 만에 연못이 다시 녹조로 뒤덮이면서 개보수 효과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누군가가 칼로 바닥을 훼손하고 비료를 뿌려 녹조를 유발한 ‘반달리즘(고의 훼손 행위)’ 탓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훼손 혐의로 6명이 체포됐다고 밝혔지만 수질 전문가들은 “거대한 반사연못에 비료를 뿌려 단기간에 녹조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자연 발생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녹조 제거를 위해 과산화수소와 수질 개선용 ‘나노버블’ 기술까지 동원했지만 전문가들은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미봉책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2020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57주년 기념행사 당시 연못에 들어가 있는 시민들의 모습. AP뉴시스
◇‘미국의 거울’에서 트럼프 시대의 무대로= 이처럼 각종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의 출발점으로 리플렉팅 풀 일대를 선택했다. 수십만 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행사는 오는 4일 오후 7시 링컨기념관과 리플렉팅 풀 일대에서 막을 올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트루스소셜을 통해 “아름답고 안전한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과 워싱턴기념탑 일대에서 역대 가장 화려한 ‘트럼프 집회’(Trump Rally), 즉 ‘미국에 바치는 헌사’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행사명을 ‘트럼프 집회’라고 붙인 데는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를 자신의 대표적 정치 이벤트로 부각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행사에는 군악대와 오케스트라, 의장대 소속 300여 명이 참여해 애국가요와 미국 고전음악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합동 군악 및 의장대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리플렉팅 풀은 시민권 운동의 무대였고 전쟁 반대의 광장이었으며 대통령 취임식과 국가 추모 행사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2026년에는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국가 행사의 출발점이 됐다. 한 세기 넘게 미국 민주주의의 굴곡을 비춰온 ‘거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곳에 비치는 미국의 모습은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