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지금 가기 딱 좋은 경남 함안

 

△ 변두리 마을의 황금빛 변신

6·25전쟁 낙동강 방어의 최전선

전투로 시가지 무너지며 쑥대밭

군청까지 가야읍에 내주고 쇠락

 

법수면 주민 공장단지 들어서자

4만㎡ 땅에 해바라기 꽃밭 조성

축제는 끝났어도 지금부터 절정

 

△ 기품·풍류만은 여전한 고장

강주리 꽃밭 두배 규모 연꽃파크

삼국시대 씨앗으로 홍련 싹 틔워

선명한 선홍빛 꽃잎 고귀한 자태

 

상주 주씨 집안 종가의 별당정원

전국의 명승과 겨뤄도 손색 없어

벼슬집착 않던 학자 품격 묻어나

함안 강주리의 해바라기밭. 올해는 해바라기꽃 만개 시기를 축제 후반부쯤과 딱 맞췄다. 축제는 2일까지 열리지만, 해바라기꽃은 이번 주말을 지나 열흘 넘게 더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함안 강주리의 해바라기밭. 올해는 해바라기꽃 만개 시기를 축제 후반부쯤과 딱 맞췄다. 축제는 2일까지 열리지만, 해바라기꽃은 이번 주말을 지나 열흘 넘게 더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함안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함안군청은 왜 ‘가야읍’에 있을까

보통 군청은 그 군(郡)의 지명을 딴 읍(邑)에 있다. 함양군청은 ‘함양읍’에 있고, 예산군청은 ‘예산읍’에 있다는 얘기. 이건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런데 함안은 다르다. 함안군에는 ‘함안면’이 있다. 일단, 읍 아닌 면이라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더 이상한 건 함안군청이 함안면 아닌 ‘가야읍’에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함안면은 왜 ‘함안읍’이 되지 못했으며, 함안군청은 왜 함안면이 아닌 가야읍에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전쟁 전까지 함안의 중심은 함안면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함안은 뜻하지 않게 낙동강 방어선의 최전선이 됐다. 전투로 시가지가 무너졌고, 함안면 일대는 쑥대밭이 됐다. 더 이상 행정 기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전후인 1954년 함안면에 있던 함안군청이 가야면으로 옮겨갔다.

군청이 옮겨간 가야면은 본래 함안의 중심이 아니었다. 남강이 자주 범람해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던 곳이었는데, 경전선 철로가 개통되면서 농토가 늘고 점차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정적이었던 건 ‘기차역(驛)’이었다. 철로 부설에 거부감을 가졌던 지역 유림의 반대로 함안면의 중심 봉성리에 들어서려던 함안역이 가야면으로 옮겨가면서 변두리였던 가야는 철도를 끼고 본격적으로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중심이동에 가속도를 붙인 건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시가지가 무너진 함안면 대신, 마침 기차역으로 성장하고 있던 가야면이 군청을 받았다. 폐허가 된 중심이 변두리에 자리를 내준 셈이다. 1979년 가야면은 읍으로 승격했다. 그사이 함안면은 ‘함안’의 이름을 쓰면서도 읍이 되지 못한 채 면으로 남았다.

공교로운 건 가야면이라는 지명이다. 함안의 변두리였던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대국가 시절, 옛 아라가야의 도읍지였다는 이유로 ‘가야’란 이름을 얻었다. 전쟁이 행정의 중심을 옮겨놓으면서, 1400여 년 전 가야 시대의 이름을 다시 함안의 중심 자리로 불러냈던 셈이다.

악양루 부근 도로 옆에 세워놓은 ‘처녀뱃사공’ 노래비.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으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악양루 부근 도로 옆에 세워놓은 ‘처녀뱃사공’ 노래비.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으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 함안의 오래된 시간 속으로

함안이 근대화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건너온 역정으로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이보다 더 이전에 전란에 휘말렸던 기구했던 인물 이야기를 해보자. 함안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400여 년 전쯤 거기 살았던 한 할매에 대한 것이었다.

NH농협은행 함안군지부 건물 뒤편 주차장에 조그만 쪽문이 있다. 쪽문 밖 주택가 골목에는 자그마한 화단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고, 무성한 개망초꽃에 묻혀 윗부분만 겨우 보이는 비석이 있다. 가만 보니 비석은 묘비석이고, 풀로 온통 뒤덮인 화단처럼 보였던 건 묘다. 주택가 한가운데 묘라니…. 이건 누구의 무덤일까.

묘비석으로 세워진 건 효녀(孝女)를 기리는 비다. 비석이 칭송하는 효녀는 ‘동래구(東萊구)’다. ‘할미 구(구)’자를 쓰니까 ‘동래의 할매’란 뜻이다.

동래할매는 400여 년 전쯤 동래(東萊), 그러니까 지금의 부산에 살던 기생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적이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해가는 와중에, 동래할매도 붙잡혀 왜국으로 끌려갔다. 묘비명을 따라 쓰느라 ‘할매’라고 했지만, 당시 나이는 30대였다. 전리품처럼 끌려간 타국에서 여성의 몸으로 얼마나 모진 고생을 겪었을까.

동래할매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1606년 봄 왜의 화친 요청에 대한 답으로, 조정에서 사신을 왜국으로 파견하면서 귀국길에 전쟁 당시 붙들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데, 이때 동래할매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그런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어머니 역시 왜란 때 왜국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끌려간 모녀는 서로의 소식도, 행방도 모른 채, 왜국 땅에서 10여 년을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행방은 물론이고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어머니를 찾아 동래할매는 다시 바다 건너 지옥 같았던 왜국으로 향했다. ‘맹세코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거리에서 걸식하며 왜국을 떠돌던 그는 온갖 고생 끝에 5년여 만에 어머니를 찾았다. 이때 어머니 나이 70세. 동래할매도 50세가 넘었다. 모녀의 사연을 듣고 감동한 왜국 장수는 모녀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다.

낙화놀이의 무대가 되는 연못을 두르고 있는 정자 무진정.
낙화놀이의 무대가 되는 연못을 두르고 있는 정자 무진정.

# 400년 전 할매 무덤이 남아있는 까닭

동래할매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 살아갈 방도가 막막해 언니와 함께 어머니를 업고 함안으로 와서 살았다.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자매는 날품을 팔아 먹고살았는데, 동생인 동래할매는 옷이나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언니부터 챙겼다. 동래할매는 80세를 넘겨서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동래할매 이야기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꼽히는 미수 허목의 문집 ‘미수기언’에 실려서 전한다. 경기 연천이 본가인 허목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40대 초·중반부터 10년 동안 경남 의령, 창원 등지에 머물며 곳곳을 유람했다. 동래할매 얘기도 그가 경상도 땅을 유람 중 길 위에서 듣고 기록한 것이다. 허목의 동래할매 얘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마을 어른들이 다들 훌륭한 할멈이라며 장례를 치르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함안 방목리의 할매 무덤을 물어서 찾아가 들렀다.” 허목이 주위에 물어서 무덤까지 찾았던 건 동래할매의 효심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피붙이 하나 없었던 동래할매의 묘가 도심 한복판에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사히 남아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동래할매 무덤은 허목이 찾았다는 그 무덤이지만, 비석은 100여 년 전쯤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비석을 다시 세우기까지의 얘기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300년이 지나서…옛터가 장차 없어지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감독관에게 말했더니 ‘이와 같은 뛰어난 행실은 처음 듣는다’면서 자취가 드러나도록 땅을 쓰도록 허락했다. 이에 작은 빗돌을 장만해 비석을 세우고 행적을 갖추어 실으니 때는 1921년 8월 10일이다.”

동래할매의 무덤이 지워지지 않은 건, 글의 힘이다. 허목이 할매의 얘기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다면 무덤도, 비석도 진작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어떤 건 글로, 어떤 건 경관으로 남겨진다. 또 어떤 건 추억으로, 또 어떤 건 맛으로 기억된다. 허목은 유람 중에 동래할매 이야기를 만났고, 후세의 여행자들은 허목이 전해준 이야기를 따라 동래할매를 찾아간다. 여행은 그렇게 남겨지고 기억되는 것 사이를 드나드는 일이다.

다만 아쉬웠던 건 무덤은 물론이고 비석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묘가 무성한 잡풀에 뒤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버려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 봐야 손바닥만 한 무덤 자리. 풀을 깎거나 사연 적은 안내판 하나 세우는 것쯤이 무어 그리 어려운 일일까.

# 함안의 해바라기, 여행을 유혹하다

여행에서 ‘타이밍’은 중요하다. ‘그때 왜 거기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언제 가도 두루 다 좋은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행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건 대개 ‘시기를 딱 맞춰야 하는’ 목적지일 때가 많다. 비교적 덜 알려진 여행지일수록 더 그렇다. 시기를 딱 맞춰서 가는 건 중요하다. ‘적절한 시기’야말로 여행을 결심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길을 나서게 하는 충동’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함안으로 향하는 여행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지금 딱 좋은 명소’는 어딜까. 함안은 잘 알려진 여행지가 아니어서 여행을 결심하는 데는 적절한 동기가 필요하다. 지금 함안여행의 강력한 동기로 삼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법수면 강주리의 해바라기꽃밭이다. 강주리 마을 뒤 구릉에는 지금 해바라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함안 강주리 해바라기꽃밭 면적은 4만2500㎡. 평으로 환산하면 1만2800여 평이다. 일반적인 초등학교 운동장(3000㎡)의 14배쯤 되는 면적이다. ‘광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규모는 아니다. 이만한 넓이의 해바라기밭이라면 만개했을 때 관람객들이 탄성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

해바라기밭이 있는 법수면 일대는 시골이지만, 목가적인 농촌 경관만 펼쳐지는 건 아니다. 마을 길을 달리다 보면 크고 작은 공장들이 두서없이 나타난다. 강주리 해바라기는 공장으로 흐트러진 주변 때문에 시작됐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거환경이 나빠지자 주민들이 주변 밭에 해바라기를 심기 시작했고, 그게 사람들을 불러모으면서 지금처럼 거대한 해바라기꽃밭이 됐다는 얘기다.

강주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해바라기 축제를 연다. 2013년부터 시작한 해바라기축제는 올해로 14회째다. 지난달 18일 개막한 축제는 2일 끝났다. 축제는 끝났어도 해바라기꽃은 아직 성하다. 축제가 끝나고도 만개한 꽃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다. 꽃은 이번 주말까지가 절정이겠고, 다음 주말까지도 볼만하겠다.

이런 종류의 별서 정원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근사한 무기연당. 연못가의 늙은 소나무와 향나무에서 어우러진 정자와 누각에 스며든 시간이 보인다.
이런 종류의 별서 정원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근사한 무기연당. 연못가의 늙은 소나무와 향나무에서 어우러진 정자와 누각에 스며든 시간이 보인다.

# 고려 때 연 씨앗이 지금 꽃으로 피다

꽃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곳 더 가보자. 해바라기만큼 알려진 건 아니지만 함안에는 연꽃도 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했으니, 연꽃은 지금부터가 딱 좋은 때다. 함안에는 강주리 해바라기밭 면적의 두 배쯤 되는 연꽃테마파크가 있다. 연꽃테마파크는 가야읍 공설운동장 주변 가야시대 제방 터에 있다. 연꽃테마파크를 권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함안의 ‘특별한 연꽃’과 만날 수 있어서다.

먼저 ‘법수 홍련’. 법수면의 옥수 늪에서 자생하는 우리나라 토종 홍련이다. 경주 안압지의 연꽃과 유전자가 똑같은, 신라 시대 계열 연꽃으로 알려졌다. 키가 작고 은은한 연분홍색을 띠며 향기가 짙은 편이다. 20년 전쯤 서울 경복궁 경회루의 연꽃 복원과정에서 복원 대상 품종으로 뽑혀 서울로 올라갔던 이력도 있다. 함안 출신의 시조시인 이병기의 호 ‘가람’을 이름 삼은 연꽃 ‘가람 백련’도 있다. 생전에 청아하고 고결한 느낌의 백련을 특히 좋아했던 시인이 직접 기르고 아꼈다는 백련이다. 청아하고 고결한 느낌의 순백색 꽃이 크고 정갈하다.

함안 연꽃 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단연 ‘아라(阿羅)홍련’이다. 옛 ‘아라가야’ 땅이었던 함안의 연꽃이라 해서 ‘아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라홍련은 삼국시대 쌓은 산성을 발굴하다가 연못 자리에서 출토된 700여 년 전의 연 씨앗을 심어 길러낸 홍련이다.

아라홍련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삼국시대 산성 유적 발굴 도중 성안 연못 자리에서 연 씨앗을 발견한 게 시작이다. 연구소는 씨앗 10개를 함안박물관에 넘겨줬는데, 박물관은 그중 2개를 골라 국립지질연구원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하나는 760년 전, 다른 것은 650년 전의 씨앗인 걸로 밝혀졌다.

오래된 씨앗을 받아 든 박물관은 궁금했다. 700년 된 연꽃 씨앗이 과연 발아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박물관은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을 받아 연꽃 싹 틔우기에 도전했다. 10개의 씨앗 중 3개의 씨앗이 기적처럼 싹을 틔웠다. 700여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던 연꽃 씨앗이 시간을 건너와 꽃으로 핀 것이다. 그게 2010년 7월 6일의 일이다. 날짜를 기록해두고 기념할만한 일이었다.

함안의 아라홍련은 그때 3개의 씨앗에서 꽃을 피운 연을 뿌리로 번식시켜 키우는 연이다. ‘아라’라는 이름은 함안이 ‘아라가야(안라국)’의 옛 땅이라는데 착안해서 지어진 것이다. 아라홍련은 다른 연꽃과는 생김새가 좀 다르다. 색깔이 옅은 편이지만 꽃잎 끝에는 선명한 선홍빛이 살아있다. 꽃잎의 수효가 적은 대신 하나하나가 길고 크다. 연꽃테마파크를 둘러보며 아라홍련을 찾아보자.

# 무기연당의 풍류와 기품

함안은 내로라하는 관광지는 아니지만, 이름난 명승과 겨뤄도 꿀릴 게 없는 대표급 명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칠원읍의 ‘무기연당(舞沂蓮塘)’이다.

무기연당은 상주 주(周)씨 집안 종가에 딸린 별당과 연못 정원이다. 석축을 쌓아 만든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에 정자와 누각, 사당 등을 앉혔다.

무기연당의 풍류에는 기품과 격(格)이 깃들어 있다. 정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어 양심대(養心臺)라 이름하고 돌에다가 ‘백세청풍(百世淸風)’ ‘봉황석(鳳凰石)’의 글씨를 써넣었다. 연못 정원의 정취를 그윽하게 만드는 건 연못 옆에서 아름드리 곰솔과 가지를 뒤틀고 자라는 향나무다.

무기연당의 중심은 연못 정면에 세워진 정자 ‘하환정(何換亭)’이다. ‘하환(何換)’은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란 뜻.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조대(釣臺)’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 ‘삼공불환(三公不換)’에서 가져왔다. 시에 나오는 ‘불환(不換·바꿀 수 없다)’이란 낚시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三公)의 바쁜 생활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무기연당의 주인 주재성은 실제로 정자 현판의 뜻을 지켰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가 세 번에 걸쳐 천거했음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근사한 정원에서 누리는 한가로움을 한낱 벼슬살이의 번잡스러움과 바꾸지 않았다는 얘기다.

연못에서 반 발짝쯤 뒤로 물러난, 살짝 높은 자리에는 누각 풍욕루(風浴樓)가 들어서 있다. ‘바람(風)으로 몸을 씻는(浴) 곳’이란 이름 때문일까. 누각은 가운데 칸을 비워 자연스레 바람이 들고 나도록 했다. 풍류가 뭐 별건가. 하환정의 툇마루에 앉아 연못과 연못 속의 섬, 양심대를 감상하거나, 풍욕루의 대청에서 바람을 느끼며 앉아있노라면 세상의 번잡함에서 멀리 떠나온 듯하다.

# 악양루에서 부르는 노래, 처녀뱃사공

함안에 간 길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몇 곳 이야기를 더 보탠다. 함안천과 남강이 만나는 산자락의 바위 절벽 아래에는 ‘악양루(岳陽樓)’란 누각이 있다. 수직의 깎아지른 바위 절벽의 중턱쯤에 들어선 정자다. 정자에 올라 물길을 굽어보는 정취도 좋지만, 더 감탄스러운 건 정자를 앉힐 수 없는 강변 벼랑에다 주문대로 정자를 들여놓은 이들의 정성이다.

악양루는 안에서 밖을 보는 풍경도, 밖에서 안을 보는 풍경도 모두 다 좋다. 강 건너편에서 올려다보면 단애에 솟아있는 누각이 그림 같고, 누각에 올라보면 남강의 물굽이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제방, 너른 들판 풍경이 근사하다.

악양루를 지은 이는 함안의 선비 안효순이다. 1857년 가을에 짓기 시작해 이듬해 봄, 완공했다. 악양루는 짓자마자 일약 명소가 됐다. 임자가 따로 있는데도 주민들은 다들 정자를 공유재산처럼 여겼다.

악양루는 6·25전쟁 때 포탄을 맞아 거의 완파되다시피 했다. 부서진 악양루가 전란 후에도 10년 넘게 방치되자,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1963년 5월에 음악 콩쿠르 대회를 열었다. 형식은 노래자랑이었지만, 실제로는 누각 보수 촉구 시위에 가까운 행사였다. 주인 있는 누각을 다들 제 것처럼 여겼다는 증거다.

이게 효험이 있었는지 콩쿠르 대회가 열린 지 열흘쯤 지나서 함안군수가 경남도에 악양루 복원 예산을 신청했고, 지역의 선비들도 누각 복원 모금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악양루는 그해를 넘기지 않고 말끔하게 복구됐다.

악양루에는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으로 시작되는 노래 ‘처녀뱃사공’의 사연도 깃들어 있다. 유랑극단 단장인 가수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부친인 윤부길이 피란 내려왔다가 함안에서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악양루 인근에서 하룻밤 묵어갔는데, 거기서 군 입대 후 소식이 끊긴 오빠(박기준·6·25전쟁 때 전사)를 대신해 나룻배로 길손들을 건네주던 여동생의 사연을 전해 듣고는 ‘처녀뱃사공’의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악양루는 함안여행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데 맞춤한 장소다. 악양루 최고의 시간은 해 질 무렵. 산 뒤로 넘어가는 해가 남강의 물길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장면이 자못 감격적이다.

■ 함안 낙화페스티벌

함안에서 가장 볼만한 건 무진정 연못에서 열리는 낙화놀이다. 낙화놀이는 참나무 숯가루를 한지로 말아 만든 낙화봉 수천 개를 공중에 매단 줄에 걸고 불을 붙이면, 불꽃이 비처럼 흩날려 떨어지는 걸 감상하는 놀이다. 숯과 광목, 한지, 소금 같은 천연 재료만 쓰니 소음도, 매캐한 화약 냄새도 없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에 낙화놀이가 열렸는데, 올해는 여름으로 옮겨 한 번 더 열린다. 3일과 4일 ‘함안낙화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전통 낙화놀이에 K팝 공연을 곁들인 축제로 열린다.

박경일 전임기자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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