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희숙의 Deep Read - 반도체 입지 결정 유감

 

李대통령 “호남 보상” 발언은 정치의 개입 자백… 정부 - 기업관계 개발도상국형으로 퇴보시켜

국가대항전 시대에 기업 결정권 지킨 TSMC 사례 귀감… ‘닥치고 호남’ 깨고 정상궤도 회복해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공장(팹) 후보지로 거론되는 전남광주 북구 첨단3지구.   뉴시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공장(팹) 후보지로 거론되는 전남광주 북구 첨단3지구. 뉴시스

지난달 29일 발표된 호남 반도체 투자계획에는 ‘단군 이래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러나 규모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기업의 결정이어야 할 ‘투자처와 투자액’을 시종일관 정부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은 반도체 투자가 ‘호남에 대한 보상’이라며 정치적 결정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이런 정치의 후진성과 정권의 고압성은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를 개발도상국형으로 퇴보시켜, 경제의 생명력을 꺼트릴 수 있는 최대 위험 요인이다.

◇기업 입지 결정의 전통모형

기업의 입지와 투자 결정은 기업 생존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기업의 자율적 결정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대기업 유치의 파급 효과가 심대하기 때문에 기업 유치는 지방자치단체가 역량을 쏟아붓는 핵심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찰스 티부는 기업 입지 결정에 대한 대표적 이론인 티부 모형(Tiebout Model)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경제주체는 가장 유리한 세금과 공공서비스 조합을 제공하는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는 티부 모형에서 지자체는 마치 기업처럼 유치 경쟁을 벌이며 뛰어다니는 동적 주체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안긴 ‘집적경제론’은 여기에 한 차원을 더했다. 단순한 금전적 혜택이 아니라 협력사 네트워크나 우수 인재, 물류 인프라 등 집적이익을 가능케 하는지 여부가 기업의 결정에 가장 중요하다는 통찰이다.

이들 이론처럼 현실 경제에서 지자체들은 세제 감면, 보조금, 인프라 투자, 산업생태계 조성 등을 제시하며 활발한 유치 경쟁을 벌인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2017년 아마존 제2 본사 입지 선정이다. 당시 238개에 달하는 미국과 캐나다의 지역들이 제안서를 제출했을 정도다. 이들은 대규모의 각종 지원책을 제시했는데, ‘기업 입지를 둘러싼 지자체 경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경제안보시대의 입지 결정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웨이퍼를 손에 들고 흔드는 사진은 첨단산업의 입지 결정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의 경쟁력은 이제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망을 결정할 정도의 무게를 갖는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민간회사인 앤트로픽의 AI 모델인 미토스와 페이블 일부 버전의 유통을 금지시킨 것은 이들을 아예 국가안보자산으로 취급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첨단산업 경쟁력이 국가대항전이 된 것인데, 이 상황에서 과거 티부 모형의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은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된다. 이제 지자체에 더해 ‘중앙정부 지원과 중앙정부 간 경쟁’도 중요한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첨단산업 경쟁이 국가대항전이 됐으니 중앙정부 지원이 필수요소가 됐고, 글로벌 기업으로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공급망 다변화 필요성이 커진 만큼 국가 간 유치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2021년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와 대만 남부 가오슝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지자체·국가 간 유치 경쟁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파격적인 보조금을 제공하며 TSMC를 끌어당겼고, 중화학공업 중심 외곽도시였던 가오슝시도 TSMC의 낙점을 받기 위해 대만 정부와 함께 전력과 용수, 신속 인허가 등을 총력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입지 선정을 주도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기업이다. 정부는 정책적 판단에 기반해 지원 패키지를 제안해 기업의 낙점을 받으려 애쓰고, 기업은 이것에 기반해 입지 후보들을 비교해 더 유리한 지역을 선택하는 구조다.

◇‘답정너’식 호남투자계획

TSMC 입지 선정 사례의 교훈은 국가대항전이 됐다고 해서 기업의 결정권이 희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 생존이 국가를 위해 중요해진 만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절박하게 고민할 기업을 정치권력이 가르치고 강제하는 것은 참담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호남반도체 투자계획 발표는 여러모로 대만 가오슝 반도체 투자와 대조된다. TSMC는 국책기업으로 시작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정부가 미는 가오슝 입지 결정에서 주도권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최적의 타이밍까지 주도적으로 결정을 유예했고, 종국에는 2021년 11월 TSMC 이사회의 마라톤 회의 후 공식 홈페이지와 보도자료를 통해 회사가 결과를 발표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정치권 주도로 흘러왔다. 청와대에서 발표한 것도 시사점이 크지만, 시작부터 중앙정부가 나서 ‘닥치고 호남’을 압박했다. 지난해 말, 6년 만에 겨우 착공 단계에 들어선 용인 반도체 단지를 호남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지자체발도 아닌 정치인 장관으로부터 제기됐다. 대통령 정책실장은 특정인 유튜브에 출연해 호남 투자를 홍보했고, 청와대 발표에서 산업통상부 장관은 기업의 호남 투자액이 자기 성과인 양 먼저 나서 말했다.

반면 두 대기업은 줄곧 수동적이었고, 발표 당일에는 ‘정부 지원과 시장 수요가 전제될 때 호남에 투자하겠다’는 조건부 화법으로 에둘렀다. 국가권력과 부딪혀 화를 자초하지는 않겠지만, 배임 또한 저지르지 않겠다는 기업인의 고민으로 비치기 충분했다.

◇제대로 된 경로 회복

‘왜 전남광주인가’에 대한 이 대통령의 혼돈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지도하고 유도했을 뿐 기업이 선택한 것’이라는 말도 ‘동그란 네모’처럼 혼란스럽지만, ‘호남에 대한 국민적 보상’이라는 말이 충격적이다. 청와대 발표나 대통령의 발언은 기업 입지 선정을 정치가 주도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전당대회에서 지지기반인 전남광주지역 표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목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나라 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흔드는 ‘정치의 추락’이다. 정치의 추락이 경제의 추락을 낳지 않기 위해서는 ‘닥치고 호남’을 파쇄하고 정상 궤도를 회복해야 한다.

전력·용수·인재 확보, 세제와 보조금 등 기업 유치를 위한 여건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지자체들 경쟁의 장을 열고 중앙정부 역시 주장을 내려면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지방소멸 위협에 시달리는 다른 지역 국민이 수긍한다. 강탈해온 선택권을 기업으로 되돌려야 경제가 산다.

전 국회의원, 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용어설명

‘찰스 티부’는 지역경제 및 공공경제 분야에 기여한 경제학자. 지방과 정부 간 경쟁을 유발해 효율적인 공공 서비스 공급을 가능하게 한다는 ‘티부 모형’의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

‘폴 크루그먼’은 자유무역과 경제위기, 정부정책의 역할을 다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신경제지리학을 통해 규모의 경제, 소비자의 다양성 선호, 경제활동의 지리적 집중을 설명.

■ 세줄 요약

기업 입지 결정의 조건 :기업 생존이 달린 기업의 입지·투자 결정은 기업의 자율적 결정이어야. 대만 TSMC 입지 선정 사례의 교훈은 첨단산업이 국가대항전이 됐다고 해서 기업의 결정권이 희석되지 않는다는 것.

‘답정너’식 호남투자계획 :반면 반도체 호남투자계획은 시작부터 철저하게 정치권 주도로 흘러. 정치의 후진성과 정권의 고압성은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를 개발도상국형으로 퇴보시키며 경제의 생명력을 꺼트릴 위험.

제대로 된 경로 회복 :반도체 입지 선정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나라 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 산업 미래를 흔드는 ‘정치의 추락’. 경제의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닥치고 호남’을 파쇄하고 정상 궤도를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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