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韓 롤모델 제조업 강국 獨 몰락

탈원전 전기요금 폭탄 후폭풍

옛 동독 인텔 메가 팹도 백지화

 

반도체 건설戰 거대한 도박판

공장 하나 200조 역사상 최대

이념 앞세우면 中에 덜미 잡혀

최근 글로벌 산업계에서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일은 ‘제조업 강국’ 독일의 몰락이다. 유럽 경제를 호령했던 독일은 4년 연속 역성장과 제로성장을 오가며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90년 역사의 폭스바겐이 자국 공장 4곳을 폐쇄하고 10만 명을 감원했고, 세계 최대 종합 화학업체 바스프는 생산 시설을 중국·미국으로 옮기고 있다. 기업 파산 건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이념을 앞세운 급진적 탈원전이 부른 전기요금 폭탄 탓에 중국산 저가 공세를 더는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을 맞은 셈이다. 독일 산업용 전기요금 수준은 경쟁 국가의 2∼3배 수준에 달한다.

한때 한국 산업 정책의 롤모델이었던 독일은 반면교사 모델이 됐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산업 본연의 경쟁력보다 이념과 정치 논리를 앞세운 정책적 선택이 초래한 결과다. 방파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위기를 증폭시키고 몰락을 앞당겼다는 평가다. 한국도 예외일 순 없다. 이념과 정치가 시장과 과학을 이기려 든다면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도 추락하는 독일의 전철을 밟을 수가 있다. 정부는 호남을 제2 글로벌 반도체 생산 기지로 육성하기로 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여기에만 800조 원 이상을 쏟아붓기로 한 상황이다. 문제는 오는 8월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선거를 염두에 둔 치적 쌓기용이거나, 지역 안배를 위한 정무적 수단으로도 비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내리막길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현재 반도체 증설 경쟁은 거대한 도박판으로 변해 있다. 첨단 메모리 반도체 팹 1기를 건설하고 가동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200조 원에 달한다. 단일 공장에 이 정도의 자본을 투입하는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인류가 건설한 가장 비싼 건축물로 꼽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 건설 및 운영비에 맞먹는 규모다. 호남에 짓기로 한 팹 4곳 투자비를 기업 인수에 사용한다면 세계 온라인 동영상 시장을 호령하는 미국 넷플릭스 같은 회사 두 곳을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 규모다. 반도체 공장은 일사천리로 짓는다고 해도 일러야 3∼4년 뒤에야 칩을 찍어 낼 수 있다. 만약 그사이 자칫 공급 과잉 사이클이라도 맞게 되면 글로벌 기업조차 존폐 위기로 치닫는다. 업계가 “한 번만 실기해도 수십조 원에서 수백조 원이 단숨에 증발할 수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도박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와 규제에 발목이 잡혀 한 번만 삐끗해도 기업과 산업은 물론 국가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극명한 사례가 독일의 인텔 메가 팹 유치 무산이다. 2022년 유럽연합(EU)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독립을 외치며 ‘EU 반도체법’을 발의했다. 독일 정부는 옛 동독 지역의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100억 유로(약 15조 원) 보조금을 책정하고 인텔 메가 팹 유치를 성사시켰다. 인텔도 300억 유로 이상을 투입해 마그데부르크에 1나노급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짓기로 화답했다. 하지만 인텔과 독일 정부는 보조금 승인 지연과 토양(유기농 흑토) 규제 갈등, 탈원전 여파에 따른 전력망 단가 폭등 등으로 수년을 흘려보냈고, 결국 지난해 7월에는 사실상 백지화했다.

그사이에 세계 시장은 인공지능(AI) 중심으로 재편됐고 미국 엔비디아가 주도권을 움켜쥐면서 인텔은 심각한 재무 위기에 직면했다. 대비되는 사례가 대만 TSMC의 일본 구마모토 공장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농지 규제를 단 4개월 만에 뚫어주는 등 원스톱 행정을 펼친 결과, 착공 후 단 20개월 만에 준공하는 기적을 썼다.

K제조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중국은 반도체 시장조차 전체 판도를 흔들고 기존 공급망 질서 파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거대한 도박판으로 변해 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단 한 번 실기해도 철강·석유화학처럼 중국에 덜미를 잡히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정부가 4000조 원 이상의 기업 투자를 담보로 하는 ‘대한민국 메가프로젝트’를 출범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념의 자리에 과학을, 정치적 셈법의 자리에 본연의 경제 논리를 채워 넣는 것만이 K제조 심장을 계속 뛰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기자
이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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