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직장을 버텨낸 내 친구들은 대부분 부장들이다. 이사로 승진하지 못하면 점점 투명인간 취급을 받다가 나가야 될 처지. 이사가 된다 해도 잠깐의 수명 연장일 뿐 나을 건 별로 없다. 1년 계약직으로 재계약이 안 되면 역시 나가야 할 처지니까.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해왔지만 꼰대 소리 듣기 일쑤다. 존경은 바라지도 않지만 언젠가부터 아저씨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보이는 현실 앞에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이 중년의 위기에 처한 아저씨들의 마음을 저격하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단 4회 만에 21.6%(닐슨코리아)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한 SBS 금토드라마 ‘김부장’이 그 단적인 사례다. 한국판 ‘테이큰’으로 불리는 이 드라마는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로지 딸 하나만을 지키며 살아온 김부장(소지섭)이 어느 날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숨겨왔던 정체를 드러내며 처절한 추격전을 펼치는 액션 누아르다. 딸을 위해 무릎 꿇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하던 김부장이, 사실은 북에서 내려와 전향한 공작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시청자들은 짜릿한 도파민의 액션을 기대하게 된다.
‘김부장’의 이야기 구도는 저 ‘테이큰’처럼 단순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놀라운 파괴력을 보여주게 된 건 현실의 중년 아저씨들이 가진 정서적 공감대 때문이다. 막강한 아빠의 뒷배를 가진 일진에게 지속적인 학교폭력을 당해왔지만,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게 된 딸을 위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는 김부장의 모습은 중년 아저씨들을 공감하고 분노하게 만든다. 거기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체를 드러낸 김부장이 딸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향해 내뻗는 주먹에는 그간 쌓아왔던 감정들이 얹어진다.
‘김부장’의 액션 판타지는 역시 신드롬을 만들었던 영화 ‘아저씨’를 닮았다. 전직 특수요원이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핏빛 혈투를 벌이는 이 영화가 신드롬이 된 건, 당시 아저씨를 폄하하던 세상의 시선들이 만들어낸 반작용도 한몫을 차지했다. ‘김부장’은 이 기본 구도 안에 아빠라는 가족 설정과 부장이라는 일터의 현실감을 넣어 한껏 폭발력을 높여 놓았다.
중년 남성의 현실과 판타지를 담은 작품들은 그 밖에도 많다. 작년 방영되어 화제가 됐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역시 ‘김부장’이 등장해 변곡점에 선 위기의 중년 남성의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평생 살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해준 게 없는 걸 알게 된 김부장이 스스로에게 “미안하다”고 토닥이는 장면은 이 땅의 많은 김부장을 울린 바 있다. 또 최근 방영된 MBC ‘오십프로’ 역시 중년 남성의 판타지를 담은 작품 중 하나다. 한때 국정원 블랙요원이었고, 잘나가는 조폭 주먹이었으며, 신출귀몰한 남파공작원이었던 세 중년 남성이 현재는 각각 중국집에서 일하는 가장, 편의점 사장, 공장 직원으로 살아가며 과거에 얽힌 사건을 풀어나가는 코믹 액션물이다. 역시 짠하면서도 시원한 사이다 판타지가 펼쳐진다.
물론 이러한 중년 남성 판타지물이 많아진 건, 최근 들어 OTT의 영향으로 장르물이 부쩍 늘어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로나 나왔을 법한 액션 누아르들이 이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속속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중년 남성 판타지물도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부장’ 같은 작품이 신드롬급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건 그 안에 담긴 억눌린 중년 남성들의 감정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물론 세상엔 적지 않은 꼰대들이 존재하지만, 그보다 많은 선량한 가장들이 있다. 꼰대와 개저씨를 빌런으로 세우는 작품들만이 아니라, ‘나의 아저씨’의 진짜 어른 같은 아저씨들을 담은 작품도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