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81년 만에 행정지명 된 인천 제물포구

 

△ 영종역사관 ‘김찬삼 특별전’

1958년 태평양 건너 160國 여행

아프리카 가봉선 슈바이처 만남

 

△ 추억 스민 인천도시역사관

60년대 부평서 만든 신진자동차

부모세대 향수 부르는 시간 여행

 

△ 달동네 담긴 ‘수도국산박물관’

보로꾸 담장·함석지붕·선거벽보

고단했지만 역동적인 삶 그대로

 

△ 古書많은 ‘배다리 헌책방 거리’

서울서도 찾을 만큼 지식인 명소

‘대한서림’ 동인천 만남의 장소

 

△ 레트로 분위기 물씬나는 동인천

삼치골목·애관극장·도레미양행

일정표 없이 걸어도 추억 돋아

월미도의 월미공원 전망대. 영종도와 먼바다는 물론이고, 뒤로 돌아서면 인천항과 제물포 일대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월미도의 월미공원 전망대. 영종도와 먼바다는 물론이고, 뒤로 돌아서면 인천항과 제물포 일대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는 곳이다.

# 인천의 지도를 바꾸다… 제물포구

인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지난 1일 인천 지도가 바뀌었다. 인천 중구 내륙과 동구가 통합돼 ‘제물포구’로 새로 출범한 것. 지금 인천 도심 곳곳에는 제물포구 출범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진짜 제물포’가 정식 행정지명으로 지도 위에 이름을 올린 건 자그마치 81년 만의 일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에 ‘제물포역’이 있지 않냐고? 그건 공식 행정지명이 아닌 역 이름일 뿐이다. 그것도 ‘제물포 아닌 곳’에다 제멋대로 붙인 잘못된 작명이다.

제물포를 처음 공식 행정지명으로 가져다 썼던 건 미 군정(軍政)이었다. 해방 직후 일제식 ‘부(府)’ 제도를 폐지하고 시(市)로 개편하려 했던 미 군정은, 1945년 10월 10일 ‘인천부’의 지명을 ‘제물포시’로 바꿨다. 그렇게 바뀐 건 딱 17일뿐이었다. 미 군정의 행정구역 개편이 실패하면서 10월 27일 제물포시는 다시 인천부로 되돌려졌다.

사라졌던 제물포란 행정지명이 80여 년 만에 다시 불려 나오게 된 건, 동서남북 방위로 지어진 인천의 이른바 ‘편의주의적 방위(方位) 지명’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동구, 서구, 남구…. 지역의 역사성이나 상징성 없이 단순히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이런 식의 작명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일찍부터 있었다. 인천 북구가 1995년 부평구로, 남구가 2018년 미추홀구로 개명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새로 출범한 제물포구는 중구 일부와 동구를 통합해 만들어졌다. 지역을 통합한 건 인구 유출과 경제침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원도심이 두 개의 자치단체로 쪼개져 있어 발전이 어렵다는 지적 때문이다. 두 곳 모두 ‘동인천’으로 통칭하는 원도심 구역인 만큼 제물포란 이름 아래 하나가 돼서 도시 쇠퇴에 함께 대응하겠다는 얘기다.

여기까지는 인천의 선택과 관련한 얘기. 그렇다면 여행자에게는 뭐가 달라질까. 우선 인천 여행에서 겨누고 갈 목적지가 선명해졌다. 식민지 근대, 또는 가까운 과거의 추억을 보러 인천에 가겠다면, 이제 무조건 ‘제물포구’다. 중구와 동구가 통합했으니 너무 넓지 않냐고? 천만의 말씀. 제물포구는 22㎢로 인천 자치구 중 면적이 가장 좁다. 제물포구로 통합하면서 중구가 영종도나 용유도 등 섬 지역을 새로 만들어진 ‘영종구’에 떼어줬기 때문이다.

송도 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 중인 김찬삼의 여행사진을 감상하는 노년의 관람객.
송도 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 중인 김찬삼의 여행사진을 감상하는 노년의 관람객.

# 근대 말고 한 세대 전쯤의 인천

인천 제물포에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건 개항장과 차이나타운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기억이다. 근대박물관, 근대문학관, 근대건축전시관, 개항장 거리…. 인천에서 근대를 여행하는 데는 안내가 따로 필요 없다. 발길 닿는 곳마다 안내판이 서 있고, 골목마다 그 시절을 복원해 놓았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근대를 잠시 비켜서기로 한다. 개항장의 이국적 건물들 말고, 그 뒤에 이어진 시간. 해방 이후부터 한 세대 전쯤까지, 제물포가 겪은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건 역사적인 개항의 서사에 가려 좀처럼 조명되지 않았던, 그러나 지금의 제물포를 만든 시간이다.

제물포의 이야기를 한 명의 인물로 시작한다. 여행가 김찬삼.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8년, 배낭에 ‘KOREA’를 붙이고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사람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세계 일주 여행가. 14년 동안 지구 32바퀴의 거리를 여행하면서 160개국 1000여 개 도시를 밟았던 인물.

그의 여행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최빈국 가난한 나라 여행자가 품었던 뜨거운 열정이다. 해외여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시절, 그는 무모하다고 할 만큼 열정적으로 세계를 여행했다. 자신의 시신처리를 부탁하는 유서를 품고 떠난 여행을 통해 그는, 가난했던 우리에게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고, ‘국경 밖 세상’을 꿈꾸게 해줬다.

‘그깟 여행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여행은 지금의 여행과는 완전히 달랐다. 김찬삼에게 여행은 고행 또는 탐험이었다. 한국이란 나라를 아예 몰랐던 다른 나라 출입국관리소에서 억류당하고 취조받는 것쯤은 다반사였다. 한국 여권을 처음 본 외국 출입국 관리가 여권을 ‘가짜’라며 집어 던졌고, 입국을 거절당해 뙤약볕 아래 며칠씩 노숙을 하며 사정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굶주림에 피로가 겹쳐 쓰러진 적도 있었고,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쫓아낸다며 개를 푸는 서러운 홀대까지 겪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김찬삼이 2차 세계여행을 하던 1963년 11월 아프리카 여행 중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만나서 찍은 기념사진. 영종역사관에 전시 중인데 “밀랍인형과 찍은 사진이냐”고 묻는 관람객도 있단다.
김찬삼이 2차 세계여행을 하던 1963년 11월 아프리카 여행 중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만나서 찍은 기념사진. 영종역사관에 전시 중인데 “밀랍인형과 찍은 사진이냐”고 묻는 관람객도 있단다.

#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

김찬삼은 여러 권의 여행기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10권짜리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그야말로 기념비적 저술이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그 책은 100만 권이 넘게 팔려나갔다. 탁월한 식견과 촘촘한 서술로 완성한 ‘우리 눈으로 본 세계’ 이야기는 지금 읽어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가 꿈을 키운 곳이 바로 지금의 제물포구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와서 창영초를 다녔고, 인천중(지금의 제물포고)을 졸업했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뒤 인천으로 돌아와 5년 동안 고교 교사로도 재직했다. 본적도 제물포구의 원도심인 중구 내동이었다. 훗날 그는, 어린 시절에 인천 부둣가에서 외국 선박을 바라보며 오대양을 누비는 꿈을 키웠다고 술회했다.

제물포는 조선 시대 삼남(三南)의 조운선이 한강으로 올라가기 전 정박하던 나루였고, 개항기에는 서양 문물이 밀려든 관문이었다. 사람과 물자가 바다를 건너던 곳. 1883년 개항 이래 세계로 열린 문이었던 제물포에서 한국 최초의 세계 여행가가 자란 셈이었다.

하필 지금 제물포에 와서 김찬삼을 떠올린 건,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서다. 그걸 기념해 인천 영종도의 영종역사관에서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 전’이 열리고 있다. 김찬삼의 여행 사진과 책, 기록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다. 아프리카 가봉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찍은 사진도 있고 개조한 차량으로 미국 여행 도중 찍은, 지금으로 치면 ‘차박’을 하는 사진도 있다. 그의 여행 사진에서는 뜨거운 열정이 듬뿍 묻어난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영종역사관은 김찬삼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역사관이 들어선 자리는 김찬삼이 2001년 세운 ‘세계여행문화원’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영종도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세계여행문화원은 공항신도시 부지로 수용됐는데, 2015년에 그걸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게 영종역사관이다. 그러니까 영종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특별전은, 그를 ‘지워버린’ 자리에서 그를 ‘기억하자’고 마련한 전시인 셈이다.

송도 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 중인 김찬삼의 폭스바겐 비틀.
송도 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 중인 김찬삼의 폭스바겐 비틀.

# 뒤집어 놓은 표지석만 남다

영종역사관 주차장에서 입구로 들어서는 길가의 대숲 뒤에 높이 3m쯤 되는 기둥을 닮은 큰 돌이 하나 누워 있다. 세계여행문화원 앞에 서 있던 표지석이다. 전면이 안 보이게 뒤집어 내려놓아 비석 뒷면의 글씨만 읽을 수 있다. ‘2001.6.5 設立者(설립자) 金燦三(김찬삼) 鄭安順(정안순)’ 말년에 병상의 김찬삼을 간호하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의 이름도 함께 있다. 설립일 6월 5일은 김찬삼의 생일이다.

표지석이 뒤집힌 채로나마 비석이 남아 있는 건 영종역사관을 설계한 건축가 정상모의 배려 덕분이다. 영종역사관을 설계한 정상모는 그 자리가 김찬삼의 세계여행문화원 자리였다는 걸 설계 일을 맡고서야 알게 됐다. 기념비적 인물의 과거를 없애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역사관 건축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그에게는 설계만 맡겨졌을 뿐이니 방도는 없었다.

세계여행문화원의 표지석을 뒤집어서라도 ‘제자리에 놓아두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50대 후반의 나이에 제 손으로 세계여행문화원을 없앤 정상모는, 칠순의 나이에 지난 2월에 김찬삼세계여행문화협회 이사직을 맡았다. “요즘 세대들이 김찬삼의 이름을 잘 모르는 건, 한 세대의 지식인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지 못해서”라는 게 그의 얘기. 그가 ‘김찬삼기념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인천에서 볼 수 있는 김찬삼의 또 하나의 유산은 자동차다. 김찬삼은 1970년 세 번째 세계여행 당시, 독일의 올가라는 여성으로부터 자동차 ‘폭스바겐 비틀’을 선물로 받아 타고 들어왔다. ‘우정 2호’라고 이름 붙인(우정 1호는 이전에 그가 타고 다녔던 오토바이다) 폭스바겐을, 그는 1982년 수명을 다할 때까지 탔다. 세계여행문화원으로 옮겨진 차는 문화원이 헐리자 영종도의 창고에 방치된 채 녹슬어가다 한 시민단체의 노력과 유족의 기부로 복원돼 2021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송도 인천도시역사관 전시실에 자리를 잡았다.

송도 인천도시역사관 로비에 전시 중인 클래식카. 일본 토요타자동차가 개발한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다. 이 차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인천 부평공장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팔렸다.
송도 인천도시역사관 로비에 전시 중인 클래식카. 일본 토요타자동차가 개발한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다. 이 차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인천 부평공장에서 만들어져 국내에 팔렸다.

# 역사가 아닌 추억의 시간

김찬삼의 폭스바겐 말고도, 인천도시역사관에는 3대의 ‘클래식카’가 더 있다. 역사관 로비에 전시하고 있는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다. 모두 일본 토요타자동차가 개발한 모델. 왜 인천도시역사관에 일본 차가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이 차들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인천 부평공장에서 생산돼 국내에서 팔렸던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신진 삼총사’라고도 불렸던 이들 차량은 1960년대 부유층이 소유했던 ‘추억의 마이카’였다. 그 시절, 퍼블리카는 ‘실용적인 홈카’였고, 크라운은 ‘달리는 응접실’이었으며, 코로나는 ‘신뢰의 승용차’였다.

인천도시역사관의 클래식카가 특히 반가웠던 건, 거기 접어놓은 시간이 100년도 넘는 식민지의 기억이 아니라 적어도 부모 세대들의 기억이 닿을 수 있을 만한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감이라면 ‘역사’가 아니라 ‘추억’이다.

여행자들이 인천에서 주로 보는 건 ‘근대’다. 목포나 군산 등 개항장이 있었던 곳은 대부분 비슷하다. 식민지시대와 겹치는 근대는 무겁다. 일제강점기의 무거운 기억이 도시 공간을 짓누른다. 역사의 무게 추는 근대로 기울지만, 인천에서 여행자들이 더 가깝게 공감할 수 있는 건 손에 잡힐 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 세대 전쯤의 시간이다.

수도국산박물관에 영화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달동네 풍경. 디테일이 훌륭하고 입체감도 뛰어나다. 이런 유의 다른 공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완성도가 압도적이다.
수도국산박물관에 영화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달동네 풍경. 디테일이 훌륭하고 입체감도 뛰어나다. 이런 유의 다른 공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완성도가 압도적이다.

1960∼1980년대의 인천은 흥미진진하다. 그 무렵 인천은 경제개발의 중심이 되는 공업지대와 무역 항구도시였지만, 점차 서울과 부산에 밀려나면서 ‘낙후한 공장지대’쯤으로 인식됐다. 그때의 인천을 대표하는 도시풍경이 ‘달동네’다. 전쟁 직후 인천으로 몰려든 함경도, 황해도 등 이북 피란민들은 산동네로 올라가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좌판 장사를 하거나 항만 부두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나중에는 일자리를 찾아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이주민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고단했지만 억척스러웠고, 치열했으나 역동적인 그 시절의 달동네를 그때 모습 그대로 박제해놓은 박물관이 제물포구 송현동에 있다.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다.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재건축되기 40여 년 전쯤의 인천 달동네와 거기 살았던 이들의 삶을 담아놓은 곳이다.

박물관의 압권은 세트장처럼 재현해놓은 달동네 풍경이다. ‘보로꾸(시멘트블록)’ 담장과 함석지붕, 좁은 골목과 전봇대, 찢어진 선거벽보…. 디테일이며 입체감이 그야말로 깜짝 놀랄 정도다. 비슷한 곳이 경주에도, 순천에도, 합천에도 있지만 여기 대면 어림도 없다. 그만큼 압도적이란 얘기.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이게 적당하겠다. ‘여긴 그냥, 미쳤다.’

박물관이 보여주는 건 과거의 인천이지만, 그 시절 누추한 살림살이와 형편은 어디나 다 비슷했다. 인천이 고향이 아니라도 박물관이 재현해놓은 가난했던 옛 모습 앞에 서면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는 이유다.

화평동 냉면거리의 ‘아저씨냉면’. 주문 제작한 초대형 스테인리스 그릇에다 냉면을 가득 담아줘서 ‘세숫대야 냉면’이라고 불렸다.
화평동 냉면거리의 ‘아저씨냉면’. 주문 제작한 초대형 스테인리스 그릇에다 냉면을 가득 담아줘서 ‘세숫대야 냉면’이라고 불렸다.

# 세숫대야 냉면의 양이 줄었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과거 얘기로 넘어가 보자. 인천의 음식 중에는 ‘면 요리’가 특화돼 있다. 개화기 차이나타운에서 시작했다는 자장면도 그렇고, 신포시장에서 실수로 굵은 면발을 뽑은 게 시작이었다는 쫄면도 인천을 대표하는 면 요리다. 자장면과 쫄면에다 대면 역사가 짧긴 하지만, 인천에서 냉면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는 ‘세숫대야 냉면’이 있다. 진짜 세숫대야 크기만 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내주던 이른바 ‘시장 냉면’이다. 세숫대야 냉면은 화평동 일대 냉면집 콘셉트를 기획자가 가져다가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시작한 경우라 본점이 따로 없다.

체인점의 본점은 없지만, 화평동에서 가장 먼저 이른바 세숫대야 냉면을 낸 ‘원조’는 지금도 성업 중인 ‘아저씨냉면’이다. 아저씨냉면의 시작은 1979년이다. 1대 사장 김용만(74)이 지금 자리 건너편 경인전철 선로 변에 옹색한 가게를 내고 ‘미니 냉면’이란 상호를 내걸었다. 테이블 2개의 작은 가게란 의미에서 ‘미니’라 이름 붙였지만, 담아주는 냉면 양은 어마어마했다. 인근 공장과 부두노동자를 상대로 ‘양으로 승부를 보자’는 전략이었다.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인천의 대표 냉면집 ‘경인식당’의 평양냉면이 4500원일 때, 미니 냉면은 500원을 받았다.

김용만은 주로 오토바이 배달로 장사를 했는데,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로 냉면을 배달하는 그를 손님들은 ‘냉면아저씨’로 불렀다. 지금의 상호가 ‘아저씨냉면’이 된 것도, 아저씨냉면 집 간판 사진 속의 김용만 사장이 ‘헬멧 쓴 모습’인 것도 그래서다.

전성기 때 화평동에는 냉면집만 30곳을 헤아렸다는데, 지금 화평동에는 그때의 반의 반 정도만 남았다. 아저씨냉면 집에서 받은 냉면 그릇의 크기가 의외로 그리 크지 않다. “세숫대야는 어디 가고….” 2대 사장인 아들 김성기는 ‘냉면 그릇 크기가 예전과 같다’고 했다. 큰 그릇이 다양해지고 많아지면서 이제 이 정도는 보통으로 여겨지게 됐다는 얘기. 과거 그만한 크기의 그릇이 없어 주물제작업체에 주문을 해서 따로 만들어 썼다는데, 지금은 기성품을 쓴다고 했다.

그릇은 그대로인 반면에 냉면 양은 줄었다. 그때만큼 배가 고프지 않은 시대라 그럴까. 김성기는 “곱빼기의 양이 그 시절의 ‘보통’보다 좀 적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시중의 냉면집보다는 훨씬 푸짐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책방. 1960∼1970년대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거리’로 불렸을 때는 헌책방이 40곳이 넘었단다. 지금은 헌책방 5곳, 독립서점 3곳이 남았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책방. 1960∼1970년대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거리’로 불렸을 때는 헌책방이 40곳이 넘었단다. 지금은 헌책방 5곳, 독립서점 3곳이 남았다.

# 대한서림과 배다리 헌책방

1970∼1980년대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인천에는 신포동과 동인천역 일대가 있었다. 지금이야 주안과 부평에 밀려나서 ‘중심’의 자리를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지만, 그 시절 동인천역 주변은 늘 인파의 물결로 가득 찼던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때 인천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진 곳이 몇 곳 있다. 그중 한 곳이 1953년 문을 연 동인천역 맞은편 ‘대한서림’이다. 대한서림은 한때 인천 젊은이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다방은 언감생심이었던 주머니가 가벼웠던 당시 청춘에게 서점은 훌륭한 약속장소였다. 그 시절에는 5층 건물 전체가 다 서점이었는데, 10년 전쯤 인터넷서점에 밀려 폐업을 결정했다가 시민들의 성원으로 폐업을 철회한 뒤에는 규모를 크게 줄여 지금은 2∼3층만 서점으로 쓰고 있다.

서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천을 여행한다면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배다리 헌책방거리’다. 헌책방거리는 한국전쟁 이후 형성됐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고서(古書)가 모이고 이북에서 내려온 지식인들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책방거리가 만들어졌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명성은 전국구였다. 배다리에 귀한 책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을 정도였다.

지금 배다리에는 헌책방 다섯 곳, 독립서점이 세 곳만 남았다. 지금 배다리의 헌책방은, 과거의 책방과는 다르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변두리 중의 변두리가 된 배다리에서 과거처럼 헌책만 팔아서는 굶기 딱 좋으니까. 배다리의 책방 주인들은 다들 뭔가 하는 일이 있다. 문화기획 전문가도 있고, 평생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도 있다. 일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나 이루고자 하는 꿈도 저마다 있다. 공통되는 게 있다면 다들 ‘관계’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었다.

인천 전동에는 삼치 골목이 있어 한때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삼치 골목의 원조집이라 할 수 있는 ‘인하의집’의 삼치구이 상차림.
인천 전동에는 삼치 골목이 있어 한때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삼치 골목의 원조집이라 할 수 있는 ‘인하의집’의 삼치구이 상차림.

# 인천에서 추억을 여행하는 법

동인천역 주변의 전동 삼치 골목도, 애관극장 뒤쪽 언덕 위 지금은 사라진 대폿집 골목도 1980년대 인천을 추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삼치 골목에는 가난했던 일꾼들을 위해 막걸리와 안주로 값싼 삼치를 튀겨주던 가게들이 골목에 늘어서 있었다. 1972년 처음 문을 열었던 삼치 골목의 터줏대감 ‘인하의집’이, 그때만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삼치구이와 순두부찌개, 계란말이 등의 안주로 묶은 세트메뉴가 인기다.

동인천역 인근에는 ‘잉글랜드’를 비롯해 레트로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경양식집이 몇 곳 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는 사진관도 여럿 있다. 1980년대 초반 문구점으로 문을 열어, 한때 디제이까지 두고 스낵코너를 운영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대동학생백화점’도 아직 문을 열고 있다.

인천이 흥미진진한 여행지인 건, 파란만장한 시간의 무늬를 갖고 있어서다. 개항기의 역사부터 손에 닿을 듯한 추억까지…. 인천에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갈피를 뒤져가며 여행할 곳이 많다. 촘촘한 일정표는 없어도 된다. 추억 여행이라면 그저 제물포에 가서 동인천역이나 신포국제시장, 애관극장, 배다리 헌책방거리, 도레미양행, 더 멀리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화수자유시장 등을 목적지로 삼기만 하면 된다.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의 쇠락한 구도심을 거니는 것만으로 여행은 충분하니까.

■ 北 고향땅은 못 밟은 김찬삼

‘한국 최초 세계여행가 김찬삼’ 전시가 열리고 있는 인천 영종도 영종역사관 전시실 한쪽에는 관람객들이 전시를 본 감상을 종이에 적어 걸어놓는 자리가 있다. 거기 어린아이가 쓴 듯한 인상적인 글귀가 있었다. 비뚤배뚤한 글씨로 적은 글이 이렇다. “김찬삼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아니 아니 아저씨도 북한은 못 갔겠지?” 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찬삼은 전 세계 곳곳을 누볐지만, 아이의 말대로 생전에 고향인 북한 땅은 밟아보지 못했다.

박경일 전임기자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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