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구씨는 인터뷰 장소로 가던 중 지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응, 나 건강하게 잘 지내. 너도 어디 아픈 데 없지?”라며 선량한 느낌을 주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정하종기자 maloo@munhwa.com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배우 신구(75)씨는 개그맨도 아닌데 이런 유행어를 퍼뜨린 적이 있다. 전자는 1999년부터 10년간 방송된 KBS2TV 드라마 ‘부부클리닉 - 사랑과 전쟁’의 조정위원회 판사로 나와 방송 끝머리에 했던 말이다. 후자는 2003년 한 CF의 대사로, 전 국민이 따라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2007년엔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치매 노인으로 나와 했던 말 ‘초코파이 줄까?’도 유행어가 되며 관련 제품의 매출을 크게 끌어올렸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가 지난 2년여간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양재천 인근의 개포동에 살다가 2년 전에 잠실의 한 아파트로 이사왔다고 했다. 노년에 접어든 아내가 도심에서 친구들도 쉽게 만나고 시장도 편하게 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양재천 산책을 즐겼던 그로서는 번잡한 도심이 갑갑하지만 아내가 좋아하니 참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랑과 전쟁’에서 그가 전파했던 부부간 양보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고나 할까.
―건강해보입니다. 요즘도 걷기운동 많이 합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신체를 잘 타고난 덕분에 지금껏 크게 아파 본 적 없어요.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요. 양재천을 늘 걸었는데, 여기 온 뒤로는 아파트 내 피트니스클럽에서 1주에 3~4회 정도 러닝머신으로 운동을 합니다. 한 번에 1시간 정도 하면 땀이 좀 나요.”
―최근에 왜 TV 드라마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섭외가 오면 내가 하고 싶어야 하는데 그게 서로 안 맞았어요. 요새는 기획사라는 게 있어서 섭외를 다 담당한다고 하더군요. (나처럼) 거기에 소속돼 있지 않으면 출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요.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추세가 있으니 내가 덜한다고 해서 불만을 삼을 것은 없겠지. 나는 석양인데…(허허, 하며 웃는 모습 속에 약간의 쓸쓸함이 배어있는 듯했다. 음색이 독특한 그의 말투는 대체로 정중한 존대를 유지했으나, 간간이 ‘니들이 게맛을 알아?’ 투의 편안한 하대가 섞였다).”
―당분간 출연 계획이 없는 건가요.
“어제 하나 연습했어요. 6월에 방송하는 MBC의 ‘넌 내게 반했어’라고. 어제 처음 연습하고 왔지. 표민수 PD가 연출하는 것인데, 예술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나는 주인공 할아버지로 나와.”
―드라마를 쉬는 동안에 연극 무대에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페리클레스’ 등에 출연했는데….
“명동예술극장 개관작 ‘맹진사댁 경사’도 했어요. 젊을 때 무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귀소본능이라고 할까, 향수랄까 그런 게 있어서 연극을 못 잊는 거죠. 연극에서 출발한 연기자들은 평생 무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서 상을 받았지요? 공로상이 아닌 연기상이라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허, 나이 들어서 받으니까…. 바람 같아서는 젊은이들이 받아서 힘을 얻고 그러면 좋을 텐데, 주최 측에서 좋은 뜻으로 준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그는 2010년 정부로부터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신씨는 “나보다 더 훌륭하게 일한 분들이 많은데,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온 내가 받는 것이 주제넘은 것 같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1950년대에 명문 경기고를 다녔는데, 동기 중에 연기자가 된 분이 또 있습니까.
“동기 400명 중에 연극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에요. 화가와 피아니스트 각 한 명씩, 모두 세 사람이 예술 쪽으로 빠졌지요.”(그는 “현재 문화일보 건물이 있는 옛 동양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적 있다”면서 “고교생은 못 들어가게 해서 몰래 들어갔다”며 웃었다.)
―고건(전 국무총리),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 김우중(전 대우 회장), 이준용(대림산업 명예회장)씨 등이 경기고 동기들인데, 요즘도 자주 만납니까.
“자주 못 만나요. 동기회 사무실이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데, 가끔 가보면 모두 할아버지들이에요, 하하. 유명한 친구들이 많아서 그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함부로 행동을 못했어요. 이종찬씨가 서울 종로구에서 출마할 때 옆에서 거들어준 적은 있지요.”
신씨는 이종찬씨의 권유 등 여러가지 이유로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가 구설에 휘말린 뒤로 정치판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는 “간접적으로 정치 입문 권유를 받은 적이 있으나 연기 외길 이외에 한번도 곁눈을 판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예명(申久)을 동랑 유치진 선생이 지어줬다는데, 오랠 구(久)자를 쓴 게 절묘합니다. 40년 넘게 현역으로 오래 활동하니….
“하하하, ‘신구 세대의 조화’를 연상시킨다고도 하더군요. 유치진 선생님께 ‘내 본명(신순기)이 연기자로서는 촌스럽다’고 했더니, 며칠 후에 ‘이것 써봐라’하며 주시더군요. 그때 워낙 어려운 어른이라서 감히 이름의 의미를 여쭙지 못했어요.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한 살 위의 선배 이순재씨가 “신구는 노력으로 성공한 명배우”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순재형’이 나보다 나이가 2년 앞설 겁니다. 나는 그분이 자리잡고 있을 때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 드라마 출연은 그보다 훨씬 늦었지요(그는 26세때 연극 ‘소’로 데뷔하고, 36세때 비로소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친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실함이 있었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무대 위에는 결결이 내 땀방울이 떨어졌지요. 텔레비전은 무대와 메커니즘이 달라서 다른 노력을 해야 했어요. 녹화 당일 카메라 리허설 후 점심 먹고 슈팅 들어가는데, 점심때 스튜디오가 텅 비면 나는 밥을 먹지 않고 혼자 대본 리딩 연습을 했어요. 시간을 아껴 쓴 것이지요. 우리 쪽 일이 재능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성실한 노력이….”
진지모드로 이야기하는 그에게 “연예계 성공은 운이 크게 좌우하지 않느냐”고 어깃장을 놨다. 그는 흐흐, 하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진지한 어조로 돌아갔다.
“글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할지 모르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멜로 연기, 키스 신을 한번도 못해 봤다고 한 적이 있는데.
“사실이에요. 멜로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생겼으니까 감독들이 (그런 배역을) 줄 생각을 안 했나봐.(웃음) 초기엔 주로 부정적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불만 없이 열심히 했어요. KBS 반공드라마 ‘야간비행’을 찍을 때 처음엔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내가 밥도 안 먹고 열심히 하니까 작가인 김동현씨가 비중을 자꾸 늘려서 나중엔 전체 극의 가운데에 선 적이 있어요.”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2002년)에서 철딱서니 없는 노인네 역할을 맡아서 그때까지 쌓아왔던 ‘진지한 배우’ 이미지를 다 날렸습니다.
“그 전에는 나에게 근엄한 아버지 이미지가 있어서 접근하기 껄끄러운 쪽이었다고 해요. 시트콤 하고 나니까, 이 할아방도 만만하고나, 그랬는지 초등학교 얘들이 접근을 해오더라고. 내 벽이 허물어진 것 같더라고.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알다시피 김병욱 PD의 시트콤은 단순히 웃기지만 않고 인생의 모든 것을 놓지 않고 가요. 페이소스도 있고….
―2003년 ‘니들이 게맛을 알아?’ CF가 요샛말로 빵 터졌습니다. 예상했습니까.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콘티에 있는 대로 대사를 했을 뿐이야. 그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패러디한 것이잖아. 그게 왜 입에 오르내릴까 생각을 해보니까 ‘게’에다가 뭣을 대입해도 말이 되니까 그랬던 게 아닐까. ‘니들이 커피맛을 알아?’ ‘니들이 여자를 알아?’ 그것이 아마 재미있었던 듯싶어.”
―MBC가 준비 중인 시트콤 ‘하이킥3’(가칭)에 신구 할아버지를 캐스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글이 떴더군요.
“그래요? 몰랐습니다. 집에 컴퓨터가 없으니까 알 수 없어요. 컴퓨터를 못하니까 불편한 게 있지만 괜찮아요. 정보가 늦으면 한 걸음 더 걸으면 되니까. ‘슬로 라이프’라는 것도 있잖아요. 인터넷 댓글을 보면 아무래도 너버스(예민)해지지 않겠어요. 그걸 모르니까 안정감 있게 내 식대로 살 수 있어요.”
신씨의 전통적 삶의 방식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를 “섭섭하니 술 한잔 하고 가라”며 붙잡는 데서 또 한번 드러났다. 그가 호주가라는 것은 방송가에 널리 알려져 있다. “KBS 동료인 최정훈, 송재호, 김인태 등과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데, 그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이라서 술을 안 마신다”고 섭섭해할 정도다.
신씨는 요즘에도 매일 소주 1병씩 마신 후에 잠을 청한다고 했다. “아내가 그렇게 술을 마시려면 왜 운동을 하느냐고 해. 그러면 술을 마시기 위해 운동한다고 하지, 하하.”
이날 그는 안주도 거의 들지 않은 채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며 소주 1병을 훨씬 넘게 마셨다. 알싸하게 취기가 오르는 분위기에서 신씨는 “요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서민들 살기가 갈수록 힘들어져 걱정이 많다”고 했다. “저축은행 사건을 봐. 은행 사람들도, 은행을 관리해야 하는 관료들도 모두 문제 투성이야. 이자 몇 푼 더 받겠다고 돈을 맡긴 서민들만 고통을 받고….”
하루에 신문을 4~5시간씩 본다는 신씨의 이야기는 정치, 경제, 사회, 남북관계 분야에 두루 걸쳤다. 그는 특히 북쪽의 정권이 3대 세습을 하며 폭정을 하는 것에 대해 개탄했다. “내재적 관점인가 뭔가를 내세워서 북쪽 정권의 문제에는 눈을 감은 채 인도주의적 지원만을 주장하는 시각을 이해할 수 없어요. 북쪽의 현 정권은 하루 빨리 무너져야 해요.”
그는 이처럼 자신의 소신을 뚜렷하게 밝혔으나, 어조는 특유의 부드러움을 유지했다. 그는 술자리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지만, 나와 다른 의견도 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차장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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