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부터 강남스타일까지… LP가 들려주는 대중가요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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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LP가이드북 / 최규성 지음 / 안나푸르나

“뽀얗게 먼지 쌓인 LP 몇 장이 소년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 강렬하고도 따뜻한 사운드에 반해 홈이 파이도록 듣고 또 듣고…. 틈 사이로 들리는 노이즈마저도 사랑했었다.”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노래로 유명한 밴드 ‘사랑과 평화’의 리더 최이철은 이 책 추천사에서 LP가 그를 음악의 길로 이끌었다고 털어놨다. 역시 소년 LP 마니아였던 대중음악평론가인 최규성 씨가 영혼의 소리가 담긴 LP 음반의 홈을 따라 한국 대중음악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대중가요 LP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옛 LP 재킷 사진을 뜯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한국 대중음악의 내비게이터로도 훌륭한 이 책은 빠르게 만들어져 단시간에 흡수되다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천박한 디지털 음악 문화에 대한 묵직한 경고장이기도 하다. 책에는 유성기(留聲機·축음기)의 SP부터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오른 싸이의 ‘강남스타일’까지 191장의 음반에 관한 이야기들이 1300여 장의 사진과 함께 담겼다.

대중가요 음반을 천대하던 시절을 거치고, 무수한 격변을 겪으면서 한국 대중가요 LP들은 어느샌가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음반들을 먼지더미에서 찾아내고 집대성한 이 책은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음반 그 자체를 위한 가이드북이며 음악적 지리지다. 정황과 자료를 통해 밝힌 대한민국 최초의 12인치 LP ‘KBS 레코드 시리즈’와 어두운 시대에 저항의 노래를 담아 일본에서 공개됐던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수의를 입은 김지하의 옥중 앨범, 최초의 포크 앨범을 발표했던 아리랑 브라더스, 두 번이나 금지곡의 낙인이 찍혔던 ‘댄서의 순정’ 등 대중음악사적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뽑아서 실었다.

제대로 음악사적 평가도 받지 못한 채 푸대접을 받은 숨은 곡을 콕 짚어주는 대목에서는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내린다. 맑고 순수한 포크의 원형질을 담은 포크 듀엣 ‘현경과 영애’의 유일한 독집은 지난 1974년에 나왔다. 희귀 음반이라서 100만 원에 근접하는 고가품이 됐다. 2003년에는 초반에 수록되지 못했던 조동진의 곡 ‘마지막 노래’가 수록돼 LP와 CD로 발매됐다. 빼어난 미모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청순미를 뽐낸 리리 씨스터스의 앨범 B면에는 남성 듀엣 투코리언스의 노래가 실렸다. 투코리언스의 데뷔 앨범이기도 한 이 음반에는 김민기의 곡 ‘길’ ‘친구’의 진귀한 버전이 실려 있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 ‘늦기 전에’에는 한국 사이키델릭의 숨겨진 명곡인 2면 수록곡 김선의 ‘떠나야 할 그 사람’이 들어있었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 ‘님은 먼 곳에’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처음 취입 제의를 받은 가수는 패티 김이었지만 녹음 당일 리사이틀 무대에 출연하는 과오를 범했다. 첫 방송이 임박한 방송국으로서는 긴박한 사태였다. 급한 김에 방송사는 대타 가수를 요청했고 신중현은 김추자를 추천했다.”

외환위기 때 죽을 대로 죽은 아버지들의 기를 살리기 위해 되살아난 곡이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이다. 1960년대 오기택의 노래가 히트했을 때는 하루에 팬레터가 60통이나 밀려들어 답장을 대신 해주는 사람을 2명이나 고용했다는 사연도 이 책에 실려있다. 1965년 말 최희준이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달라며 난리가 났다. 이 노래는 이 공연 1주일 전에 시작한 KBS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다. 순회공연에 앞서 급히 드라마 주제가를 녹음만 했을 뿐 당시 최희준은 가사조차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책은 이 같은 사연과 함께 영화 주제가 ‘하숙생’ OST 앨범을 소개하고 있다.

노래를 히트시킨 가수로 인해 원곡의 주인이 잊힌 사연들도 흥미롭다. 저자는 전인권이 불러 유명해진 ‘사노라면’은 쟈니리가 부른 ‘내일은 해가 뜬다’가 오리지널 곡이라고 소개한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1966년 길옥윤이 작곡하고 김문응이 노랫말을 썼으며 극장쇼의 슈퍼스타 쟈니리가 불렀다. 스타 시스템에 의해 발표된 노래란 이야기다. 1966년 발표된 쟈니리의 첫 독집 ‘쟈니리 가요앨범’은 중장년 세대의 애창곡인 ‘뜨거운 안녕’이 수록된 음반이다. 나오자마자 품절 사태를 빚으며 35만 장이 팔려나간 당대의 베스트셀러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사실 독집에 앞서 길옥윤 작품집 ‘빛과 그림자’ 음반에 먼저 수록됐다.”

출간을 기념해 책에 소개된 80여 장의 오리지널 음반은 이달 말까지 서울 마포구 동교동 복합카페 갤러리 1984에서 전시된다. LP가 부활하는 시대여서 이 책 출간의 의미가 더 깊어보인다.

예진수 기자 jiny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