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팬데믹에 전쟁까지…인류는 왜 나아지지 않는가”

최근 ‘페스트의 밤’(민음사)을 영미판보다 한국어로 먼저 선보인 노벨문학상(2006)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 40여 년 전부터 전염병을 다룬 소설을 쓰기 위해 구상해 왔고, 방대한 자료를 조사·취재했다. 2016년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했는데,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코로나19’를 맞닥뜨리게 됐고, 파묵은 “코로나를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다”라는 걸 알림과 동시에, 소설 일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창작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복잡다단한 시간을 보내며 완성한 소설은 그 시간의 밀도 만큼이나 깊고 촘촘하다. 1900년대 실제로 있었던 페스트 유행 시기를 다루지만, 배경은 가상의 섬이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지금 우리를 닮아 낯익다. 방역과 격리를 둘러싼 혼돈, 매일 생겨나는 새로운 소문과 거짓말, 개인의 선택과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정치, 도덕, 이해관계, 종교…. 파묵이 지금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소설에서 그는 가상의 역사학자인 여성 화자(미나 민게를리)를 내세웠는데, 이번에는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국내 10여 개 언론사 기자들의 질문을 취합해 책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대 터키어과 교수가 줌으로 파묵을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을 요약·정리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뉴욕 집필실에서 오르한 파묵. 민음사 제공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를 쓴 계기나 배경이 궁금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형이상학적인 것을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서구 여행가들이 쓴 회고록에서 이스탄불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시민들이 그다지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 터키인, 무슬림들, 아시아인들이 페스트에 대해 운명론자 같은 태도를 취했다고 쓴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3차 페스트 유행 시기에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에서 수천만 명의 사망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수만 사망했다. 그런 부분도 페스트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집필 중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졌다. 소설의 재미가 반감될 거라는 우려는 없었나.

“2020년 3월,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온 터키인 하즈들을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관계자들이 그들을 함부로 대했고, 이에 하즈들이 도망쳤다는 뉴스가 1면에 실렸다. ‘페스트의 밤’에 묘사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축약하느라 애썼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여기에 익숙해도, 세월이 흐르면 또 잊힌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내 소설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축약하지는 않았다. 또, 나는 서둘러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인터뷰를 해야 했다. 지난 3년 반 동안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있으며, 페스트와 격리, 방역 등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이러한 사건에 영향을 받아 급하게 소설을 썼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1901년 무렵 페스트를 포함해 과거 전염병에 대해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한 것으로 안다.

“영국의 식민지에 있던 영국 의사들이 쓴 보고서를 많이 읽었다. 이 의사들은 영국에 있는 상관 의사에게 회고록을 쓰듯 당시 상황들을 써 보냈다. 어디 어디에 갔고, 어디를 소각했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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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를 다룬 소설 카뮈의 ‘페스트’가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과 어떤 차별성이 있나.

“나는 카뮈의 ‘페스트’를 2년 동안 컬럼비아대에서 학생들과 읽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19세 때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카뮈를 아주 존경한다. 그런데 ‘페스트’는 사실 페스트에 대한, 방역에 대한 사실주의 소설이 아니다. 예컨대 오랑시 도시의 문이 폐쇄된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1940년대에 어떤 도시에 문이 있을 수 있나. 또, 밤에 앰뷸런스가 와 환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장면도 나치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데려가는 것을 상기시킨다. ‘페스트’는 나치들이 프랑스를 점령한 것을 묘사한 아주 멋진 알레고리 소설이고, ‘페스트의 밤’은 사실주의적인 팬데믹 소설이다.”

―소설과 지금은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지만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반응이나 상황 등이 굉장히 닮았다.

“비슷한 건, 처음엔 전염병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어요’라고 하면 ‘뭐 감기에 걸려 죽었겠지’하고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하고 사람들이 죽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걸 누가 가져왔는지 뒷담화를 시작한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장기간 지속하는 방역에 지쳐 반발한다. 그러나 두려움의 이유는 다르다. 과거 페스트 때는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어도 다른 곳의 상황은 어떤지를 잘 몰랐다. 지금은 텔레비전만 켜도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본다. 또,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도 알 수 있다. 과거엔 너무 몰라서, 지금은 너무 잘 알아서 두려워한다.”

―소설에는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휘둘리는 오스만 제국의 풍경도 있다. 전염병과 이것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소설은 페스트의 창궐 당시 인간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오스만제국 말기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오스만제국은 서구 제국주의가 아니라 내부 갈등으로 붕괴했다. 민족주의와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다. 소설은 그런 오스만제국 말기의 풍경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관료, 파샤(문무 고위직), 군수, 의사들이다. 그들의 삶도 소설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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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민게르 섬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긴 사람도, 이를 역사소설 형태로 쓴 사람도 모두 여성이다.

“작가로서 결심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내 작품에선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내부에서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나는 중동 지역 남성이다. 그들의 전형적이고 형편없는 사고가 안타깝지만 내게도 존재한다. 이런 내 모습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장 자크 루소가 ‘자신의 어머니와 다투는 남자는 항상 부당하다’는 말을 했다. 나에게 적용해 보면, 페미니스트 비평가들과 싸우는 중동 남성들은 항상 부당하다 (웃음).”

―팬데믹에 전쟁의 비극까지 더해졌다. 왜 인류는 과거의 경험에서 진일보하지 못하는 걸까.

“푸틴은 아주 원시적이고 나쁜 방법으로 우리 모두를 두렵게 했다. 과거의 세계로 퇴보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각국은 다른 나라의 상황에 간섭하려 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다’라고 해도 미국이 전투기를 띄우지 않는다.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트위터에 올라온 영상,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련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중세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두 왕이 협약을 했으니까. 서구 세계는 우크라이나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기 위해 도와주는 한편 안타깝지만 관망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모든 것에 대해 답을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나(웃음).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인류가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소설가이고 정치적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단지 이러한 모순을 소설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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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판보다 한국어판을 먼저 선보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난아 씨(번역자)가 아주 열심히 번역했기 때문이다. (웃음) 미국에서는 책이 출판되고 서점에 자리 잡는 데에는 1년이라는 기간이 걸린다. 편집자들의 수정도, 공급 체인도 천천히 돌아간다. 독일어판과 프랑스어판은 한국과 비슷하게 출간됐다.”

―코로나19 기세가 아직 꺾이지 않는 가운데,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에서 내 작품이 사랑받아 너무나 좋다.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또 가고 싶다. 나는 낙관론자다. 이 팬데믹이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가서 박물관들도 다시 방문하고, 거닐고 싶다. 독자들이 보여준 따뜻한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박동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