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물류 거점, 외세침략땐 외국군 주둔지…‘영욕의 땅’

  • 문화일보
  • 입력 2022-03-3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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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06년에 건립된 용산역, 일제강점기 용산 일본군 병영, 용산총독관저(위 사진 왼쪽부터).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 제공


■ What - 대통령 집무실 이전장소 거론 龍山 의 역사

조선 한성 ~ 전국 이어준 결절점이자 경강상인 본거지… 1900년 1월 서계동 ~ 청파동 ~ 원효로 전차 개통되며 근대문물 최전선 지역 돼
한강 접하고 남산 가까워 전략 요충… 임진왜란 왜군·임오군란 청군 눌러앉고 일제땐 일본군 사령부·광복후엔 미군기지 들어서


‘용산(龍山)’ 하면 많은 이들이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자리 잡은 미군 기지와 이태원, 전자상가 등을 떠올린다. 최근엔 국방부 인근 ‘용리단길’이 노포(老鋪)와 신생 맛집이 함께 어우러져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일 대통령 집무실을 국방부 신청사로 이전한다고 발표하면서 ‘영욕의 역사’를 간직한 용산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외국군 주둔 기지로 ‘수난의 역사’ 점철 = 서울기록원과 용산구청 등에 따르면 용산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과 전국을 이어주는 주요 결절점으로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자 물류의 중심지였다. 한강과 인접해 전국의 세곡(稅穀) 등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漕運船)과 상인들이 몰려들며 큰 포구로 발전했으며, 한강에서 활약한 경강상인의 본거지였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뜨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됐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 구간에 전차가 개통되면서 근대 문물을 먼저 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용산은 그러나 외국군들이 주둔했던 군사기지로서 ‘수난의 역사’가 도드라진 곳이었다. 한강과 접해 있고 남산과도 가까워 역사적으로 군사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크게 패한 왜군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용산에 진지를 구축한 게 외국군 주둔의 시작이었다. 근대 들어 용산에 다시 군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 계기였다. 조선 정부는 1881년에 창설한 별기군에 특혜를 준 반면, 구식 군대를 푸대접했다. 이에 멸시받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군대가 임오군란 진압을 빌미로 용산에 주둔하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당시 청군과 조선군의 전투는 현재의 경리단 인근에서 벌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군란 배후로 지목돼 청에 납치된 곳도 용산이었다.


◇일본의 한반도 통치와 대륙 침략의 거점 =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용산 일대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중에 반강제적으로 한일의정서(1904년)가 체결됐고, 일본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할 수 있다’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따라 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수용했다. 1905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뒤 용산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경의선)를 개통하는 등 철도기지 건설에 속도를 냈다. 일제는 1908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를 용산으로 이전하고, 이를 발판 삼아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지명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 남쪽에 병영이 있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일본군의 주둔으로 용산엔 일본 군인과 그 가족들이 살던 집단 거주지가 생겼다. 현재의 남영동과 후암동·청파동·용산2가동·원효로 일대로, 당시 지어진 적산가옥 등을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용산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6년 효창공원에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셨고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했다. 1949년 우익 테러로 살해된 김구 선생도 효창공원에 묻혔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빌딩 숲으로 변모한 용산역 인근 한강대로(아래 왼쪽)와 국제업무지구로 조성될 용산정비창 부지. 용산구청 제공


◇광복 이후에도 외세의 땅으로 남은 용산기지 = 조선 총독은 1945년 9월 9일, 미군 제24군단에 정식으로 항복했다. 제17방면군사령부가 용산을 떠나면서 일본군의 용산기지 역사는 마무리된다. 대신 용산기지를 접수한 미군은 이곳을 ‘캠프 서빙고(Camp Seobinggo)’라 명명했다. 용산의 군사 기지 색채는 냉전 체제의 심화로 더욱 짙어졌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호조약이 맺어지며 용산 일대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4년 뒤인 1957년 일본 도쿄(東京)에 주둔했던 유엔군사령부(UNC)가 용산기지로 이동해 주한미군사령부(USFK)를 창설했다.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창설되면서 용산기지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적인 장소로 변모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용산에 자리 잡았으며, 1989년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에는 육군본부도 용산에 있었다.

용산엔 미군 주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1957년 미 8군 병사들의 외출이 허용되면서 이태원에 위락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삼각지 화랑(畵廊)거리도 전쟁 이후 가난한 화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나 명화를 모작·판매하면서 생겼다. 용산기지 내 미 8군 클럽은 한국 록 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을 비롯해 공전의 히트곡을 낸 패티킴(‘그대 없이는 못살아’), 한명숙(‘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이 활동한 한국 대중음악의 성지이기도 하다.


◇용산 지역사 전문 박물관 탄생 = 용산의 이 같은 역사성과 문화적 다양성은 지역사 전문 박물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용산구는 1928년에 지어진 옛 용산철도병원 본관 건물을 용산역사박물관(한강대로14길 35-29)으로 탈바꿈시키고 지난 23일 문을 열었다. 등록문화재 제42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도기지로 개발된 용산을 상징한다. 용산철도병원은 철도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1984년부터는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운영되다 2011년 병원이 이전했다. 이후 용산구는 용산의 근현대사를 소개할 박물관 조성 계획을 세우고 유물을 수집해왔다. 전시된 유물은 기증받은 것을 포함, 4000여 점에 이른다. 붉은색 외벽을 유지하면서 철도병원으로 쓰였던 당시 내부 흔적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존했다.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을 지낸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용산은 구한말부터 외세의 군사기지로 수난의 역사를 거듭했지만 용산공원 조성이 말해주듯 이제 미래지향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며 “다가올 새 정부 출범으로 용산이 재편될 기회가 온 만큼 과거만 되돌아보지 말고 한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핵심 공간으로 성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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