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한수와 은희의 ‘사랑과 우정 사이’

  • 문화일보
  • 입력 2022-04-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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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년 만에 재회해 애틋한 감정을 나누는 고교 동창 한수(왼쪽 사진)와 은희는 ‘돈’을 매개로 동상이몽을 꾸게 된다.


■ 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한수와 은희

딸 유학비 벌기바쁜 기러기男
라면 끼니 때우는 외로운 신세
연매출 23억 생선가게 女사장
노처녀로 동생 뒷바라지 등골

고교 동창생으로 제주서 재회
돈 때문에 관계가 시작됐지만
차마 돈 얘기 꺼내지 못한 男
남자의 의도 알아챈 女는 울분

순수한 감정에 불을 댕기지만
괜찮게 나이들기 어려운 현실


여기 발가락을 다친 남자와 손가락을 벤 여자가 있다. 40대 후반 동갑내기 한수(차승원)와 은희(이정은)다. 제주 푸릉마을에서 함께 자란 고등학교 동창인 두 사람, 그리고 한수는 은희의 첫사랑이다. 외모도, 삶도, 속내도 많이 다른 둘이지만, 어릴 적 추억 하나로 삽시간에 다시 가까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는 ‘돈’이라는 현실적인 다리가 놓여 있다. 그래서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노희경 작가의 신작인 케이블채널 tvN 토일극 ‘우리들의 블루스’ 속 한수와 은희의 관계는 얄궂다.

◇돈이 궁한 男 vs 사랑이 궁한 女

그 남자, 한수는 은행 지점장이다. 꽤 살 만한 듯하지만, 홀로 라면을 끓여 냄비째 끼니를 때우는 신세다. 그는 딸의 골프 유학비를 대느라 집도 팔고 퇴직금도 중간 정산받았다. 고객들에게는 “믿고 돈을 맡기라”는 한수지만, 정작 자신은 이리저리 돈 꾸기에 바쁘다. 그러다 고향인 푸릉마을로 발령받게 된다.

그 여자, 은희에게 삶은 전쟁터다. 몸에서는 비린내가 가시지를 않는다. 그 덕분에 가게를 여럿 경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고, 한수가 발령받은 은행 예치금만 12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사장님’이 아니라 ‘장사꾼’이다. 오늘도 용달차를 몰고 새벽시장에 가고, 생선값을 흥정하려는 손님과 다툰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첫사랑 한수를 만날 생각에 미용실에 가서 아주 잠깐의 사치를 부린다. 하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동생들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는 은희의 삶도 한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많을 뿐.

학창시절 한수는 돼지를 안고 버스를 탔다가 망신당하는 은희를 은근히 보호해줬다. 이후 은희는 한수를 동경했고, 한수에게 기습 뽀뽀를 감행했다. 친구들에게는 한수가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했다고 이야기하는 은희. 그건 그녀가 만든 자신만의 첫사랑 판타지였다. 하지만 친구가 이를 공개적으로 확인하려 하자, 한수는 “내가 너를 강제적으로… 너도 좋아했잖아”라며 은희의 거짓말과 자존심을 지켜준다. 은희는 기절할 만큼 감동했고, 이 기억은 향후 은희 인생의 가장 짙은 분홍색으로 채색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수에게 은희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너 제주 왔다는 말 들었다. 동창회 나올 거지? 와라, 꼭! 얼굴 봐야지, 내 첫사랑!”

일상이 팍팍한 한수에게 동창회는 썩 내키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은행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동창은 “영업으로 생각하라”며 재력가 은희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돈이 궁한 한수와 사랑이 궁한 은희는 20년 만에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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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진 셈 치겠다”는 女 vs “밑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男

한수의 다친 엄지발가락은 ‘절망’의 다른 말이다. 정신없이 일을 보다가 탁자에 부딪혀 발톱이 들린다. 대충 반창고를 붙인 채 절뚝이는 한수의 모습은 그의 인생처럼 처량하다.

반면 은희의 다친 손가락은 ‘희망’이다. 은희는 돌아온 한수와의 추억을 곱씹다가 생선을 다듬던 칼날에 손가락을 벤다. 주위에서 “뭐 좋은 일 있냐”고 물을 정도로 한수와의 추억은 영롱하면서도 몽롱하다. 2회에서 은희가 한수네 집을 찾아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문 앞에 서 있는 은희의 모습이 도어폰 화면을 통해 한수의 눈에 들어온다.

이 장면, 익숙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가정부로 출연했던 이정은의 모습과 겹친다. 그 문을 여는 순간, ‘기생충’의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노 작가의 의도가 읽히는 장면이다. 은희를 집에 들인 한수는 그의 다친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은희 역시 뒤늦게 한수의 다친 발가락의 반창고를 갈아주며 이야기한다. “내외하냐? 친구 사이에.” 하지만 한수가 그 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는 친구가 아닌 그 어딘가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한다.

한수와 은희가 목포로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후 동창들이 나선다. 그들을 통해 은희는 한수의 사정을 알게 된다. “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 거? 나 좀 전에 알았네, 너 돈 필요한 거. 내 감정 막 이용한 거지. 그치? 난 오늘 지금 평생 친구 하나를 잃었어.” 은희는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차마 돈 얘기를 꺼내지 않은 한수는 말한다. “세상 재미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너한테, 매일 죽어라 생선 대가리 치고 돈 벌어서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너한테, 기껏 하나 남아있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좋은 추억, 돈 얘기로 망쳐놓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도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미안하다.”

“친구를 잃었다”는 은희에게, 한수는 “친구야”라고 부르며 사과했다. 다음 날 은희는 한수에게 2억 원을 송금하며 “장사 밑진 셈 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수는 그 돈을 되돌려주며 “살면서 늘 밑지는 장사만 한 너에게 이번만큼은 밑지는 장사하게 하고 싶지 않다. 니 마음은 다 받았다”며 우정을 지켰다.

결국 첫사랑은 이뤄질 수 없나.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돈 앞에 장사 없나. ‘우리들의 블루스’ 속 한수와 은희의 관계는 이런 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사랑보다 우정이 진할 수 있다는 노 작가의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한수와 은희의 정서를 지배하는 테마로 가수 최성수의 노래 ‘위스키 온 더 록’을 썼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쁜 것만은 아니야/세월의 멋은 흉내 낼 수 없잖아’로 시작해서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 다 욕심일 뿐/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라고 마무리되는 이 노래는 20년 세월의 더께를 짊어지고 다시 만난 남녀의 순수했던 감정에 불을 댕기는 동시에, 괜찮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어려움을 강조한다. 한수와 은희가 세월의 멋을 아는 어른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이 노랫말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녀라는 건 분명하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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