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재건비 조달’ 놓고 충돌… EU “러 자산 몰수”- 美 “압류는 불법”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80일 넘게 항전하다 결국 러시아군에 넘어간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거리의 황폐해진 지난 5월 22일 모습. 사진 왼쪽에 있는 부서진 건물이 항전 당시 우크라이나군의 근거지로 사용된 아조우스탈 제철소다. 로이터 연합뉴스

■ Global Economy

EU외교안보 고위대표 몰수 주장
발트해 3국 등 유럽서 잇단 동의

美, 몰수땐 자산예치 회피 악영향
세계금고서 위상 추락할까 우려
탈레반이 아프간 재장악했을땐

美가 실제 70억달러 몰수하기도
‘불법 vs 합법’ 법적 논란도 증폭

우크라이나 전쟁이 100일을 넘기며 장기화하는 가운데 6000억 달러(약 751조45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우크라이나 재건비용 조달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이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입장이 갈려 향후 논의가 주목된다. 유럽은 서방이 ‘동결’한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 예치 외환보유액 3000억 달러를 ‘몰수’해 재건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은 동결과 몰수는 전혀 다른 문제라며 이에 소극적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유럽의 경우 전후 재건의 직접 당사자로서 물게 될 재건비용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보다는 자국에 예치된 외국 자산을 몰수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세계의 금고’로서의 위상하락을 우려한다.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러시아 자산 압류가 정치적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7일 우크라이나 북부 하르키우에서 구조대원들이 심하게 파손돼 추가 붕괴가 우려되는 16층짜리 건물을 해체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막대한 재건비용 부담 우려…유럽, 러시아 동결 자산 몰수 주장 =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동결된 러시아의 해외자산을 재건비용으로 몰수하자는 주장은 유럽연합(EU)에서 처음 제기됐다. 주제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최근 FT와의 인터뷰에서 “EU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수십억 달러 상당의 러시아 외환보유액을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렐 대표는 ‘동결한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을 전쟁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 재건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주 논리적이므로 매우 찬성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특히 보렐 대표는 아프가니스탄의 예를 들었다. 앞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하자 미국 정부가 미국에 예치된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 70억 달러를 몰수해 인도주의 자금으로 사용한 점을 거론한 것이다. 올해 2월 조 바이든 행정부는 70억 달러의 자금을 9·11 테러 희생자 유족 배상금과 아프가니스탄 주민을 위한 인도주의 기금으로 절반씩 배정한 바 있다. 보렐 대표는 “우리 주머니에 돈이 충분한데 왜 아프가니스탄의 돈은 사용해도 되고, 러시아의 돈은 사용하면 안 되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보렐 대표의 이 같은 주장은 유럽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3국과 슬로바키아는 지난 5월 24일 EU 재무장관회의에서 동결된 러시아 중앙은행 해외 예치 외환보유액을 몰수해 우크라이나 재건비용으로 사용하자고 공식 주장했다. 전쟁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자금 몰수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최근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포럼) 연설에서 “세계 각지에 흩어진 러시아 자산을 발견·압류해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 기금에 할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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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금고’ 위상 하락 우려하는 미국은 “동결과 몰수는 달라” =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미국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해외 예치 외환보유액 몰수에 소극적이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최근 독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엄청난 피해와 막대한 재건 비용을 고려하면 러시아가 최소한 관련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면서도 “그것(중앙은행 자산 몰수)은 미국에서 법적으로 허용되는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특히 미국은 자국에 예치된 외국의 외화보유액을 압류할 경우 ‘가장 안전한 자산 보관 장소’로서의 미국 지위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타국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면 특히 미국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국가의 경우 미국에 자산 예치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FT는 “러시아의 자산 동결 결정은 이미 미국과 유럽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들에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의 부를 완전히 압류하는 것은 정치적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미 중국 등에서는 이 같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런민(人民)은행 통화정책위원을 지낸 위융딩(余永定) 중국 사회과학원 명예교수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중국이 대러시아 제재와 유사한 제재에 직면한다면 해외 자산이 ‘0’이 돼버리는 위험까지도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일본에 이은 전 세계 두 번째 미 국채 보유국이다. 중국이 자산 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미 국채를 사지 않을 경우 미국도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러시아 동결 자산 몰수 가능?…법적 논란도 증폭 = 법적으로 러시아 자산 몰수가 가능한지를 놓고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NYT에 따르면 로런스 H 트라이브 하버드대 명예 법학교수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통과된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 개정안은 대통령에게 외국의 위협에 대응해 외국의 자산을 몰수할 수 있는 넓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면서 “미국 정부가 러시아의 동결 자산을 몰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라이브 교수는 최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등의 자산을 몰수하고 재분배한 사례를 전례로 지적하며 “러시아 자산이 특별한 보호조치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반대 주장도 있다. 폴 B 스테판 버지니아대 법학교수는 “아프가니스탄과 베네수엘라는 미국이 합법적으로 인정한 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와 비교할 수 없다”면서 “몰수 권한 강화를 위해 법을 개정할 경우, 러시아와 관계 악화는 물론 복잡한 법적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은행 자산 압류는 논쟁거리지만 러시아 신흥재벌(올리가르히) 자산을 압류해 우크라이나를 직접 지원하는 방안은 속도가 붙고 있다. 캐나다는 지난 4월 올리가르히 자산을 압류·매각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고 수익금을 우크라이나에 보낼 수 있도록 했고, 미국도 몰수 자산을 우크라이나에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조항 마련에 착수했다. 주요 7개국(G7)도 비슷한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