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백건우의 ‘고예스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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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피아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중간 휴식 없는 백건우 독주회
하나의 긴 호흡으로 작품 정복

작곡가 생애 전체를 조망하며
예술의 핵심·실체 꿰뚫어보기

40여년간 그려온 ‘고예스카스’
그만의 해석으로 묵직한 감명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니 나름의 행운을 누리게 된 감사의 마음을 늘 마음에 새기려 노력한다. 물론, 음악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음악회에 청중으로 앉았을 때다. 도시의 교통 체증을 뚫고 저녁 시간을 할애한 만큼 애호가의 마음으로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려 마음먹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예외 없이 직업병이 발동한다. 작곡가와의 예술적 교감을 시도하는 연주자의 멋진 모습에 심취하긴커녕 손가락의 각도나 손목의 위치, 손가락 번호의 사용 등 ‘기술적인’ 부분을 생각하느라 음악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다. 특별히 나의 집중력이 발동되는 음악회는 그 연주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리는 경우다. 아울러 그 음악회를 통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관심사, 앞으로의 행보를 흥미롭게 예상할 수 있다면 그 연주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된다. 내게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늘 최고의 감동과 흥미를 주는 음악회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무대다.

국민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에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을 진짜 음악가 백건우에 대해 크고 작은 글을 쓰며 인연을 맺게 된 것도 20년이 훌쩍 넘는다. 내가 본격적으로 그의 피아니즘에 대해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1998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작품 전곡 연주를 들은 이후부터다. 연주 시간만 2시간 30분 이상인 엄청난 프로그램을 하루에 주파한 것도 놀랍지만, 탁월한 연주력과 체력 이상으로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연주 직후 너무나도 평온한 그의 표정이었다. 피아노는 그에게 일상이고 1972년 미국 데뷔 무대 프로그램이기도 했던 라벨의 작품은 평생 연구해 온 것이기에, 음악과 삶이 하나가 된 지 이미 오래인 대가의 모습이 자연스레 묻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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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인데, 백건우의 독주회에서는 연주자의 중간 퇴장과 등장이 없으며 중간 휴식시간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 등의 동작이 집중력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다. 백건우는 그렇게 하나의 긴 호흡으로 그날의 작품 전체를 정복해 낸다. 한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 전체, 또는 한 장르의 전곡을 연주하는 것은 백건우가 선호하는 프로젝트다. 위대한 음악가를 이루는 예술의 핵심과 그 실체를 꿰뚫어보려는 그의 의지는 도전할 때마다 그 작곡가의 생애 전체를 조망해 내는 데 성공했고, 탁월한 기획들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뚜렷한 발자국들로 새겨지고 있다. 쇼팽,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그 외 많은 작곡가의 걸작들은 백건우의 손으로 다듬어져 청중에게 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32곡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과 2차례에 걸친 전곡 연주 프로젝트 역시 작품의 본질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는 끈질긴 의욕과 음악가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호기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동서고금의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그 위대함을 성경의 신약성서와 비교하기도 한다. 2005년 발표 당시 호평받았던 데카 레이블에서의 전곡 녹음 이후 2007년 전곡을 무대에 올렸고, 10년 뒤 다시 같은 프로그램에 도전했던 백건우의 당시 인터뷰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솔직한 심경이 드러났다.

“10년 동안 나의 베토벤이 어떻게 변해 왔다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연습을 하다 보면 지금껏 안 보이던 풍광이 보이고, 안 들리던 소리가 들려오죠. 제가 탐험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가을, 백건우는 그간 다루지 않았던 스페인 작곡가의 작품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음반 발매와 함께 진행된 그의 프로그램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모음곡 ‘고예스카스’였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음으로 그린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이 난곡에 대한 생각을 백건우는 40년 이상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그 옛날 카탈루냐 출신의 명피아니스트 알리시아 데라로차가 동향의 작곡가 그라나도스를 연주한 카네기홀 무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백건우가 이제야 만난 ‘고예스카스’는 많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전했다.

지난 6일 경기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 아트홀에서 백건우가 연주하는 ‘고예스카스’ 전곡을 감상했다. 세련된 터치와 당당한 품격, 무엇보다 관조적이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게 표현된 순음악적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백건우만의 해석이 두드러졌다. 연주를 마치고 길게 늘어선 팬들을 위한 사인회까지 마친 연주자를 만나, 축하와 멋진 연주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웃으며 그가 건네는 대답은 다소 의외이나 깊이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음반 녹음을 하고 연주도 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이 곡이 완전히 편해지지 않은 것 같아. 연습을 계속하면 조금씩 더 좋아지겠지….”

느릿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음악 속 비밀을 발견하려는 의욕과 흥분 어린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악보를 들여다보며 작곡가의 영감을 도움 삼아 오늘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그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