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롤 플레이어와 ‘언성(Unsung)히어로’라는 위로의 말들[최장신 기자의 NBA 이야기]

  • 문화일보
  • 입력 2022-10-22 09:27
  • 업데이트 2022-12-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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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의 NBA 선수라는 르브론 제임스. 그가 마이애미 히트에서 리핏(Re-peat·2연속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2012-2013 NBA 파이널 마지막 7번째 경기는 아직까지도 많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경기다. 많은 팬들이 아직도 르브론의 마지막 중거리 슛을 잊지 못한다. 지독한 새깅 디펜스(슛을 허용하되, 돌파를 막는 수비법)를 뚫고 드라마처럼 빨려들어 간 미들 슛. 그 슛으로 르브론은 2연속 시즌 MVP, 2연속 우승, 2연속 파이널 MVP를 기록하며 커리어의 정점에 서게 된다. 그의 별명 ‘킹(King) 제임스 ’답게 왕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2-2013 NBA 파이널 우승 직후 마이애미 히트 선수들. NBA닷컴



◇롤플레이어, ‘언성히어로’(Un-sung Hero)들

그런데 시계를 조금만 더 돌려 3쿼터로 가보면 은근히 놀랄만한 장면들이 많다. 당시 마이애미의 3점과 수비 전문 선수였던 셰인 베티에는 4쿼터 시작 전까지 5개의 3점 슛을 던져 5개를 성공한다. 애초 3점 슛 성공률 100%라는 기록도 어렵지만 당시 빽빽했던 플레이오프의 수비를 감안하면 더욱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었다. 마리오 찰머스가 3쿼터가 끝나기 직전 던진 초장거리 3점슛도 버져비터로 들어간다. 결과만 놓고 보면 베티에나 찰머스가 쏜 3점 슛 중 2개만 빗나갔어도 지는 게임이었다. 문제는 거의 아무도 이들의 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셰인 베티에와 마리오 찰머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롤 플레이어’였다는 점이다. 스포츠에서 롤 플레이어라는 의미는 ‘롤을 잘 이해하고 실행하는 선수’라는 의미보다는 ‘특정 롤에 국한된 선수’라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 예를 들어 농구에서 3점과 수비라는 롤을 전문으로 맡고 있는 선수에게는 ‘3&D 롤 플레이어’라는 별칭이 붙는다. 분명한 쓰임새가 있어 경기 양상에 따라 중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맡은 역할에서 부진할 경우 팬들 사이에서 “역시 OO 선수는 롤 플레이어가 딱”이라며 평가절하 당하기도 한다. 베티에와 찰머스의 경우처럼, 나름의 활약을 해도 기억에 잊히는 경우가 많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셰인 베티에. NBA닷컴



이렇게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주목받지 못하는 롤 플레이어들을 우리는 흔히 ‘언성히어로’(Un-sung Hero)라고 부르곤 한다. 이들을 위로·칭송하는 말들도 많다. 전설적인 NBA 감독 래리 브라운 감독은 “팀이 우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에이스의 활약이나 감독의 지략이 아니라 롤 플레이어들의 헌신”이라고 말했다. 워낙 본인이 슛 던지기를 좋아해 ‘볼 호그’라 불렸던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동료들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이라며 롤 플레이어들을 띄우기도 했다.



이는 스포츠 밖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에는 많은 ‘현실의 롤 플레이어’들을 위로하는 책과 명언들이 넘쳐난다. 언젠가부터 출판 시장 등에서는 위로와 공감을 테마로 하는 책들이 베스트 셀러를 차지하게 됐고, 강연 시장에서도 “너는 너 그 자체로 멋져” 식의 위로를 건네는 강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현실에서 모든 사람이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묵묵한 역할, 힘은 드는데 빛은 나지 않는 역할을 맡지 않을 수 없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본인들이 사는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롤 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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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일변도의 말들

그런데 이쯤 되면 다시 이런 의문이 든다. 롤 플레이어 선수들의 역할이 지나치게 무시 받는 것도 문제지만, 역으로 롤 플레이어에게 주는 ‘위로 일변도’의 말들도 문제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롤 플레이어 선수들은 정말 자신들이 영원히 롤 플레이어들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언성히어로여도, 어쨌든 영웅이니까 괜찮나? 팬들은 정말 그들을 슈퍼스타만큼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현실은 냉정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개인의 재능을 앞세우기보다 팀의 단합을 우선시하라는 ‘명언’들을 자주 만나고는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슈퍼스타 1명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실제 2014-2015 NBA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애틀랜타 호크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경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마이크 부덴홀저 감독이 이끌던 애틀랜타 호크스는 NBA가 선정하는 2015년 1월 이 달의 선수에 주전 5명이 전부 뽑히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운다. 그만큼 팀플레이의 극한을 보여준 것. 그러나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를 만나더니, 르브론 제임스 단 한 명을 제어하지 못해 4-0 스윕을 당한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5년 1월 ‘이 달의 선수’에 주전 5명이 전부 뽑힌 애틀랜타 호크스. 그러나 2014-2015 NBA 동부 결승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를 만나 4-0 대패를 당하고 만다. NBA닷컴

◇여우의 신포도

문제는 인지부조화 아닐까. 현실이 엄연히 이럴진데, 막상 우리는 ‘위로의 말’들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래리 브라운이나 코비 브라이언트의 ‘언성히어로 칭찬’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감독이나 리더급 선수였기에 즉, 팀을 이끄는 입장이었기에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이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슈퍼스타의 존재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많은 선수들이 롤 플레이어라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하려는 이유기도 하다. 이런 출세욕은 선수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면에서 경쟁심을 돋우고 결국 팀을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를 부정하고 “롤 플레이어도 영웅들이야”라고 잘라 말하는 건 어쩌면 위로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무시하는 처사 아닌가 싶다. 더 나아가 내가 슈퍼스타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슈퍼스타의 의미 자체를 깎아버리는 ‘여우의 신포도’(르상티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포도’. 포도가 따 먹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자, 여우는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라며 돌아선다.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포도를 따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신 포도일 것이라는 핑계를 창출해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나무위키



결국 수많은 현실의 롤 플레이어들이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투-트랙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직분을 자조하지 않되, 슈퍼스타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롤 플레이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이 ‘언성히어로’(Un-sung Hero)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당신이 지금도 충분히 멋진 영웅일지라도, 더 멋진 영웅이 되기 위해.

송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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