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파란만장 삶 마감[역사 속의 This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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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2-12-05 09:04
업데이트 2022-12-22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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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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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1932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들과 함께 서 있다. 자료사진



■ 역사 속의 This week

1920년 4월 10일, 신문광고란에 공개 청첩장이 실렸다. 신랑은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었다. 신부는 결혼 전 네 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했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사이에서 낳은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첫사랑 최승구의 묘를 신혼여행 길에 찾아가 묘비를 세워줄 것 등이다. 100년 전,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대에 내용 또한 파격적이었다.

정월(晶月) 나혜석은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관료를 지낸 명문가에서 부유하게 자란 그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최초의 조선인 여학생으로 도쿄(東京)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유학 시절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을 썼는데 1918년에 조혼과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단편 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열린 첫 개인전은 5000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고가에 작품들이 팔리며 대성황을 이뤘다. 조선미술전람회에도 꾸준히 출품해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다. 그러다 1927년 외교관이던 남편과 함께 떠난 1년 9개월간의 세계여행은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파리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불륜으로 1930년 이혼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의 입방아와 손가락질에 침묵하지 않고 펜을 들었다. 1934년 ‘삼천리’ 잡지에 발표한 ‘이혼 고백서’에서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고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적 인물이 된 이후의 삶은 가혹했다. 사회적 냉대와 가족의 외면 속에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파킨슨병까지 걸렸다. 재능있는 화가와 문필가로, 진보적인 여성운동가로 당당한 모습의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52세의 행려병자로 초라하고 쓸쓸하게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식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았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시대를 앞서 살았던 나혜석의 삶과 예술에 대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는 300점가량의 작품을 그렸지만, 작업실 화재로 많이 소실돼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막내아들인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의 유지로 기증된 ‘자화상’과 ‘김우영 초상’ 그리고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화녕전작약’ 등 10여 점 정도이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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