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시위부터 영토분쟁까지 … 축구로 말하지 못할 것은 없다[Global Focus]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이란과 웨일스의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B조 2차전이 펼쳐진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한 이란 관중이 ‘히잡 의문사’에 항의하며 희생자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Global Focus - ‘정치 메시지의 장’ 펼쳐지는 월드컵

이란 대표팀, 국가제창 거부하며
자국 ‘히잡 시위’ 동참의사 밝혀
관중들 현수막 등으로 정부 비판
앙숙 미국과 경기선 美 응원까지

피파 ‘무지개 완장’ 착용 금지에
‘무릎꿇기’ ‘입가리기’퍼포먼스
잉글랜드 · 독일 선수들 항의 표해

‘부모가 코소보 출신’ 스위스 주장
영토분쟁 중인 세르비아 경기서
독립영웅 이름 적힌 옷으로 도발


월드컵엔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전 세계인의 축제. 국제축구연맹(FIFA)은 수많은 국제기구 가운데 최다인 211개 회원국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질서와 평화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조차도 온갖 정치적 이유로 회원국이 195개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FIFA는 명실상부 전 세계 대표 국제기구로서 손색이 없다. FIFA가 주관하는 최대 이벤트인 월드컵은 그만큼 ‘탈이념, 탈정치’의 장으로 꼽힌다. 실제로 FIFA는 경기 중 정치·종교적 메시지를 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2022 카타르월드컵은 개막 전부터 정치 이슈가 경기 승패 못지않게 관심을 받았다. 카타르 정부는 이번 대회를 위해 300조 원을 투자했지만, 경기장 건설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인권 탄압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사회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진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월드컵이라는 사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카타르월드컵에 참가한 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국에서 불거진 문제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했다. 카타르 정부를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때로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물의를 빚었고, 경기장 밖에서 또 다른 이슈를 낳았다.

◇‘히잡 의문사’에 국가 제창 거부한 이란 대표팀…‘숙적’ 미국 응원 진풍경까지=카타르월드컵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국가는 바로 이란이다. 지난 9월 13일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을 계기로 촉발한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 월드컵 무대까지 옮아붙었기 때문이다. 이란 대표팀은 지난달 21일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B조 1차전 경기에 앞서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 방식으로 ‘히잡 시위’에 동참했다. 이란 관중들은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펼쳐 보였고, 경기 내내 권위주의 정부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선수들은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대표팀 주장 에산 하즈사피는 “이란이 처한 상황은 좋지 않다”며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가 숨진 이들을 추모했고, 포르투갈 출신 카를루스 케이로스 감독도 “모든 사람에겐 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선수들을 옹호했다. 영국 더선 등 일부 외신에선 “선수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반정부 행위자로 몰려 처형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보도했지만, 이란 대표팀의 분노는 꺾이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처럼 이란은 앙숙인 미국과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0-1 패배. 16강 진출이 좌절됐지만,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란 반정부 시위대는 폭죽을 터뜨리고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미(反美) 최전선에 서 있는 이란에서 미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연출된 셈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27세 남성이 이란 보안군(군경)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국 대표팀은 SNS에 이슬람 공화국 엠블럼이 없는 이란 국기를 올려 논란이 됐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하자 라비브(왼쪽) 벨기에 외교장관이 지난달 24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벨기에-캐나다 경기에서 성소수자와 연대를 의미하는 무지개 완장을 팔에 두른 채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AP 뉴시스

◇‘무지개 완장’ 금지한 FIFA…‘무릎 꿇기’ ‘입 가리기’ 퍼포먼스로 대응한 유럽=FIFA와 유럽은 월드컵 개막 전부터 ‘무지개 완장’ 착용 여부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카타르의 성소수자(LGBT) 탄압 등 각종 인권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잉글랜드와 독일 등 유럽 7개국 대표팀 주장은 성소수자와의 연대를 의미하는 무지개 완장을 착용하겠다고 밝혔다. FIFA는 해당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부과하겠다며 맞불을 놨다. 무지개 완장 착용 계획을 철회한 7개국은 공동성명을 내고 “벌금을 낼 준비도 돼 있었지만,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서지 못할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며 “FIFA의 전례 없는 결정이 실망스럽다”고 날을 세웠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 해리 케인이 지난달 21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이란과의 경기에서 카타르 정부의 성소수자 박해를 비판하는 의미의 ‘무릎 꿇기’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잉글랜드 대표팀은 대신 ‘무릎 꿇기’ 퍼포먼스로 항의했다. 그들은 이란과의 B조 1차전 경기에서 단체로 무릎을 꿇었는데,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은 “포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대표팀도 지난달 23일 일본과의 E조 1차전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할 때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는 동작을 취했다. 독일 매체 키커는 “선수들이 취한 행동엔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없다’는 항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BBC 등 유럽 매체 축구해설진도 무지개 완장을 찼다.

결국 FIFA는 조별리그 2차전부터 무지개 모자와 깃발의 경기장 반입을 허용했다. 지난달 29일 포르투갈과 우루과이의 조별리그 H조 2차전에선 이탈리아 국적의 한 남성이 무지개 문양의 깃발을 들고 경기장에 난입하기도 했다. 평소 성소수자 인권보호에 앞장선 잉글랜드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카타르월드컵 홍보대사직 수락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독일 대표팀이 지난달 23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E조 1차전 일본과의 경기에 앞서 카타르 정부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취지로 입을 가린 채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월드컵까지 번진 ‘발칸반도 앙숙’ 세르비아-코소보 갈등…일본은 욱일기 논란=‘발칸반도 앙숙’인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최근 전쟁 직전까지 치달을 정도로 거세게 충돌했다. 코소보가 자국 내 세르비아 차량 번호판에 대한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밝히자 세르비아인들이 실질적인 자치권을 행사하는 코소보 북부 4개 지역에선 총격전이 펼쳐지는 등 전운이 감돌았다. 코소보는 2008년 유엔과 미국 등의 승인으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FIFA는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양측이 맞대결을 펼치지 않도록 대진을 미리 조정하고 있다.

카타르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코소보가 왜 갈등의 중심에 섰을까. 세르비아는 조별리그 G조에서 브라질 등과 경쟁했는데, 문제는 같은 조에 속한 스위스였다. 스위스 대표팀 주장은 알바니아계 그라니트 자카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가 주류인 국가다. 스위스는 지난 2일 G조 3차전에서 세르비아를 3-2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자카는 코소보 독립해방군 창설자이자 국민 영웅인 아뎀 자샤리의 이름이 적힌 옷을 입고 세리머니를 펼쳤다. 코소보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카가 세르비아를 자극하기 위해 펼친 퍼포먼스였던 것.

세르비아는 지난달 25일 브라질과의 1차전 직전 라커룸에 코소보가 세르비아 일부로 표기된 지도와 함께 “(우리 영토를) 내줄 수 없다”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코소보 축구협회가 FIFA에 공식 항의했고, FIFA는 관련 안건을 다루기 위해 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이비차 다치치 세르비아 외교장관은 “FIFA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분노했다.

한편 지난달 27일 일본과 코스타리카의 조별리그 E조 2차전이 펼쳐진 카타르 알라이얀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 관중석엔 욱일기가 내걸려 문제가 됐다. 일부 일본 관중은 경기장 곳곳에 욱일기를 걸려다가 제지당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