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대기업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낳았다는 진보 진영의 오랜 통념은 틀렸다”며 “진보 진영이 혁신하려면 대기업의 공로를 인정하고 상생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웅 기자
■ 현안인터뷰 -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
불평등 해소 명분 ‘소주성’
진보진영, 열정만으로 추진
文정부서 되레 불평등 심화
수출 증가땐 임금격차 확대
불황일 땐 소득 하향평준화
결과보다 좋은 원인이 중요
규제완화로 신산업 더 키우고
중산층 두텁게 해야 ‘좋은 평등’
민주당 ‘억강부약’ 정책 대신
기업 인정해야 지지율 오를 것
‘좋은 불평등’은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불평등인데 좋다니, 어딘가 형용모순이다. 그것도 평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민주·진보 진영 정책전문가가 고안해 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지난 9월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그는 2022년을 지나 2023년으로 향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특징을 좋은 불평등에 가까운 사회, 즉 ‘경제성장(소득 증가)+불평등(소득 격차) 증가’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한다. 수출이 늘어 빈부 격차가 커진 경우와 수출이 감소해 불평등이 준 경우, 어느 쪽이 좋은 것이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다. 고금리·고환율·고물가 신3고의 늪으로 사회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한국사회에서 최 소장의 의문 제기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최 소장을 만났다.
최 소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소득주도성장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인데도 불평등은 오히려 커졌다”며 “불평등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양산 등 3대 불평등 적폐론에 매달린 진보 진영의 잘못된 통념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보수가 아닌 진보 진영 안에서부터 나온 자기비판이라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고 소득주도성장, 급속한 최저임금 1만 원 달성 등 잘못된 경제정책을 펴면서 부작용이 많이 발생했다. 진보가 유능한 국정운영 세력으로 인정받고 수권하려면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불평등에 대한 원인 분석, 정책 처방, 정책 집행 등 3가지가 연동된 정책 생태계가 조성돼야 하고 그러한 장을 마련하고자 책을 썼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진보 진영 전체가 줄기차게 요구한 정책을 문재인 정부가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소득주도성장 실패는 25년 진보 경제학의 실패나 다름없지만, 한편으론 소득주도성장을 실제로 실행해 성적표를 얻었기에 이제는 가설이 아닌 실질적 논거를 갖고 토론할 수 있게 됐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경제학에서 불평등은 격차를 말한다. 임금 불평등은 임금 격차, 소득 불평등은 소득 격차, 자산 불평등은 자산 격차로 나타난다. 좋은 불평등은 좋은 원인 때문에 불평등이 증가한 경우를 말한다.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우는 상층의 소득이 증가하거나, 하층이 떨어지는 경우, 중간층이 얇아지는 경우다. 1980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임금 불평등 추이를 보면, 수출이 증가할 때 불평등이 증가하고, 수출이 감소할 때 불평등이 감소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그럼 수출이 증가해서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우 이를 나쁘게 볼 것인가? 반대로 수출이 감소한 결과로 불평등이 줄었다면 이를 좋게 봐야 하나? 좋은 불평등이란 표현은 결과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좋은 불평등 vs 나쁜 평등, 둘 중 어느 쪽이 나은가.
“한국 경제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좋은 불평등과 나쁜 평등이 어떤 경우였는지를 놓고 이야기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 우리나라가 이른바 중국 수출로 대박이 날 때 한국의 불평등이 증가했다. 이 시기 한국의 대중국 수출 증가율은 연평균 30%에 달했다. 좋은 불평등의 대표적인 예다. 나쁜 평등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글로벌 교역량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한국의 수출도 줄고, 고용과 투자도 줄고, 불평등도 줄었다. 나쁜 평등의 대표적인 사례다. 고용·성장·소득이 연동된 불평등의 증가, 고용·성장·소득이 무너지는 평등화의 과정, 이 중 선택하라면 당연히 나쁜 평등보다 좋은 불평등이 좋다.”
―진보 경제가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불평등의 하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이 ‘노인’이다. 노인 소득을 올리는 정책을 사용할 때 불평등은 대체로 줄었다. 기초연금 인상과 노인 일자리가 대표적이다. 문 정부가 2018년 추진한 소득주도성장론은 노동자를 위한 임금주도성장론의 성격이 짙다. 저임금 노동자가 주요 대상이었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채 고용 쇼크가 왔고, 고용 쇼크를 해결하고자 노인 관련 정책들이 단행됐다. 이때 지표상으로 고용도 늘고 불평등이 개선됐다. 이러한 결과는 진보 진영에서 노인층에 대한 정책에 상대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인데, 노인층 유권자 성향이 보수 정당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좋은 평등’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좋은 평등은 어떻게 하면 중산층·중기업을 두텁게 육성하느냐에 달렸다. 그중 하나의 해결책은 ‘규제 완화’다. 규제 완화를 통해 새로운 산업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는 ‘경제환경 변화에 올라타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배터리, 시스템반도체, 바이오 등을 받쳐줄 중견기업들을 많이 키워야 한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미국의 대중국 견제 등으로 많은 기업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지정학적 상황을 잘 활용한다면 좋은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1만 원, 앞서 이러한 정책을 도입해 성공한 국가가 있었나.
“이걸 전면으로 채택한 나라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정상적 자본주의, 우리나라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에서 이러한 정책들을 전면으로 채택한 나라는 없었다. 진보 진영이 뜨거운 열정만 갖고 너무 순진하게 다가간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할 때 안정감, 균형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1만 원 정책은 너무 과했다.”
―대중(對中) 수출과 불평등의 관계에 주목했는데 이유가 뭔가.
“경제 위기에 불평등이 심화했다는 논리는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불평등이 완화됐다. 이런 국면들을 일관된 논리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고 찾은 해답이 바로 ‘수출’이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의 수출액과 임금 기준 지니계수(빈부 격차를 나타내는 숫자)의 상관관계는 0.861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대중국 수출액과의 상관관계는 0.832로 역시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즉, 중국 경제를 모르면 한국 경제 불평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민주연구원 출신으로서 민주당이 유능한 정당이 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민주당은 억강부약(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다) 대신 대기업을 장려하는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을 지향해야 한다. 재벌과 대기업, 산업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재벌은 소수 지분을 갖고 과도한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 구조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재벌 자체도 공과 과가 있기에 개혁은 하되 점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선진국 경제는 대기업 비중이 큰 경제 체제다. 대기업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대기업과의 협력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증세하지 못해 안달 난 정당, 그러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이제 민주당은 경제에 유능한 정당, 기업을 인정하는 정당, 성장과 불평등에 관심이 많은 정당, 그러한 모습을 보여줘야 지지율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정의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의당은 민주당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안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 이전에는 민주당과 차별화할 수 있는 진보 정당의 현안이 재벌·노동·복지 정책 등 크게 3가지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무상급식,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진보 진영의 노동·복지 정책 상당 부분을 수용했다. 민주당이 좌클릭을 하니 결국 정의당이 설 땅이 좁아졌다. 정의당에서 대기업 임원의 연봉을 제한하는 일명 ‘살찐 고양이법’과 같은 퇴행적 법안을 내놓은 것도 민주당보다 더 좌클릭 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 때문이라고 본다. 정의당이 어려워진 이유는 정의당이 ‘민주당의 2중대’가 돼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정의당의 1중대’가 돼서 그런 것이다. 향후 정의당이 민주당과 차별화하려면 퓨처(future·미래) 진보를 지향해야 한다.”
―좋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북유럽 국가들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드러났지만,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미국의 군사력에 무임승차한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예전에는 미국 제국주의라고 표현했는데, 요즘 가장 걱정되는 것은 미국이 제국주의를 그만두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이 핵을 쏘더라도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는 상황이 가장 큰 걱정이다. 과거 유럽의 복지국가는 크게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 가능했다. 하나는 아시아와의 초격차였다. 대규모 파업을 해도 아시아가 경쟁이 안 되니 나눠 먹는 것이 가능했다. 또 하나는 앞서 거론한 안보 무임승차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흔들리니 유럽도 허겁지겁하는 상태다. 우리는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아닌 우리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한국형 21세기 복지국가’를 고민해야 한다.”
■ 최 소장은 누구
고교 졸업후 노동운동… 대선 뒤 “민주당에 ‘졌잘싸 · 잘했졌 유령’ 떠돈다” 비판
1973년 강원도 정선군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대학에 뒤늦게 진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대학 진학과 관련해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신탁 통치에 들어갔다는 말이 나왔을 무렵 경제 분야를 잘 몰라 ‘훌륭한 운동권이 되려면 경제 공부를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경제학과에 진학했다”고 밝혔다. 노동운동을 하다 “사회주의는 망했고, 이제 유럽식 복지국가가 진보의 대안”이라고 생각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2002년 대통령선거 때 권영길 캠프에서 일했다. 오랫동안 진보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민주통합당이 2010년 무상급식을 내건 걸 보고 복지국가 노선 전환으로 이해한 것이 당을 옮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후 민병두 의원 보좌관을 거쳐 2018년 대통령 직속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에서 일했다. 2020년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지막 정책보좌관을 지냈고, 2021년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올해 6월에는 여론조사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부소장 자격으로 민주당 초·재선 의원 10명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대선·지방선거 1차 토론회에 참석해 “민주당에는 대선 이후 이재명 전 대선 후보에 대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유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잘했졌(잘했는데 졌다)’ 유령이 떠돌고 있다”며 “성공한 대선 후보와 대통령으로 평가한 결과, 민주당은 대선 패배의 원인이 없는 정당이 됐다”고 비판했다. 현재 개인연구소인 ‘신성장경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복지국가를 부탁해’ ‘2020 한국의 논점’ ‘2022 한국의 논점’ 등이 있다.
이해완 기자 paras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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