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꽃이 피는 별

  • 문화일보
  • 입력 2023-01-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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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前 이화여대 교수

12년째 아파트 뜰 꽃 관찰
매일 작은 변화에 경이로움

가슴 벅찬 것은 열매 맺기
모든 곡식과 과일이 똑같아

지구가 유일하게 꽃피는 별
나비와 벌들이 생명 이어가


겨울 추위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앙상한 모란 나뭇가지에 잎눈이 피려 해서 놀랐다. 잎눈 속에 꽃봉오리가 있다. 벌써 봄이 왔나 보다. 최근 12년째 매일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도 꽃을 관찰해 왔다. 아파트 뜰에는 갖가지 꽃이 한 해 내내 서로 다투며 핀다. 하필이면 왜 갑자기 12년 전부터 꽃을 치열하게 관찰해 오고 있는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맺어온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리라.

늦은 겨울, 아직 언 땅에서 여린 싹이 움트기 시작하고, 따뜻한 봄 햇살이 뺨에 느껴지고 대지에 물기가 번지면 계절 따라 갖가지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피기 시작한다. 산수유 노란 송아리 속에 깨알 같은 봉오리가 30, 40개 맺히고 그 작은 것이 차례차례 피는 과정은 비록 작지만 일출에 못잖게 경이롭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스마트폰은 2㎝까지 접사가 가능해서 꽃을 자세히 보는 데는 큰 카메라도 따라가지 못한다. 산수유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맺을 때까지 그 과정을 그 이듬해 2월까지 폰으로 관찰한다. 파란 열매가 빨갛게 익고 강추위에 쪼글쪼글해질 무렵, 그 열매에 넋을 빼앗기는 새 녹두 알만큼 작은 봉오리가 콩알만큼 커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아직도 노거수(老巨樹) 전체가 빨갛지만, 3월 초에는 노란 꽃을 피우며 나무 전체가 노랗게 변하리라. 여름엔 녹음에 푸른 열매가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한 해 내내 아침저녁으로 살펴봐서 아는 것이지, 그저 지나가다가 한두 번 힐끗 봐서는 그 변화 과정을 어찌 포착하랴. 10년 넘게 반복해서 살피지만 매년 새롭고 신기할 뿐이다.

봄에는 산철쭉이나 연산홍도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다. 한 해 내내 매일 살펴보는 꽃들은 문득 떠오르는 꽃 이름만 해도 적지 않다. 분꽃, 문주란, 부추꽃, 샤프란, 나팔꽃, 모과나무꽃, 회양목꽃, 주목꽃, 모란, 계뇨등꽃, 대추나무꽃, 팔손이꽃, 남천꽃, 무궁화, 사철나무꽃, 베고니아꽃, 나팔꽃, 맥문동꽃, 동백꽃, 메꽃, 금잔화 등이 눈에 선하다, 신의 손이 어루만져 저리도 많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가. 도가(道家)에서는 무위자연을 말하는데, 말 그대로 아무도 어떤 일도 안 했는데 스스로 핀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매일 보는 지극히 작은 변화일지라도 나에게는 천둥 같은 경이(驚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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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면 나비가 너울너울 날아들고, 벌들도 꽃 속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수술의 화분 주머니에 달린 꽃가루를 다리에 듬뿍 묻히고 길게 내민 암술머리로 옮긴다. 꽃들은 모두 제각기 모양이 다른 열매를 맺는데, 씨방이 열매를 맺는 과정도 흥미롭다. 꽃의 향기로, 갖가지 아름다운 색과 달콤한 꿀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그리해서 모든 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한 해 동안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가운데 가장 가슴 벅찬 것은, 갖가지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열매는 대개 둥글지만, 산수유나 대추같이 타원체로 생긴 것도 있다. 열매는 푸른색을 띠다가 대개 빨간색으로 변하는데 까맣게 익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매일 먹으며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이런 열매들 덕분이다. 모든 곡식과 모든 과일이 그렇다. 지구의 생명 또한 꽃과 열매로 영원히 이어간다.

사진 찍는 사이에 나비가 꽃에 앉으면 운이 좋은 날이라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나비가 꽃에 앉아 있는 상태를 찍으려고 조용히 다가가면 번번이 놓친다. 게다가 요모조모 찍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루에 꽃 관찰하는데 꽤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365일 매일 나의 연구원에 오가는 동안 길가의 꽃들도 폰에 담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꽃 하나 찍는 것은, 예술 작품 하나 조사하는 것과 같다. 집에서 일터로 가는 길에 우선 아파트 경내에서 30분, 길 가다가 10분, 버스에서 내려서 20분쯤 걸리니 1시간가량,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그러길 12년째. 그런데 왜 이렇게 치열하게 관찰하며 환희 작약하는 것일까.

세계의 조형 예술품에 표현된 갖가지 꽃들의 상징을 밝히려는 열의가 없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세계를 두루 다녀 보면 그리스의 신전, 불교의 법당, 이슬람교의 모스크, 그리고 천주교의 성당 등 이런 종교 건축들은 안팎 전체를 꽃으로 장엄하고 있다. 그 꽃들은 자연의 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비슷한 자연의 꽃으로 빗대어 그릇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내 학문에 전환점이 되었다. 건축뿐인가. 세계의 그림·조각·금속기·도자기·복식 등에도 온통 꽃이다. 그래서 자연과 조형 예술의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인류가 창조한 조형 예술품 가운데 문양이 90%를 차지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문양화한 꽃들을 해독하는 데 20여 년, 아니 어린 시절도 생각하면 80평생이 걸린 셈이다.

우리 은하에는 3000억 개가량의 별이 있고, 우주에는 2조 개의 은하가 있다고 한다. 불가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있는데,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이 있는 이 세계가 1000개 모인 세계가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세계가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1000개 모인 세계가 대천세계여서 삼천대천세계라 한다. 이렇게 광활한 우주 안에 오직 지구라는 별에서만 꽃이 피고 나비와 벌들이 꽃을 찾아 지구상에 생명이 이어간다. 대우주에 생명이 있는 별은 물이 있는 지구뿐이다.

꽃이 피는 오직 하나의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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