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공포·판타지 넘나드는… ‘저주 토끼’ 정보라 초기작 모음[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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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1-20 08:39
업데이트 2023-01-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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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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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지음│퍼플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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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은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후보작 ‘저주 토끼’처럼 공포, 환상, SF(과학소설)를 넘나드는 ‘정보라 월드’의 근간이 된 초기 발표작 9편과 미발표작 1편이 담겼다. 부커상으로 갑자기 부상한 듯 보이지만, 정 작가는 이미 한국 장르 문학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니, 기이한 설정과 비정한 전개, 타협 없는 반전과 결말 등 20여 년을 활동하며 쌓인 그의 세계는 넓고 깊다. ‘저주 토끼’로 보라 월드에 입성한 독자라면 ‘나무’ ‘가면’ ‘머리카락’ ‘휘파람’ 등 짧은 소설 제목만을 보고도 서늘함을 느낄 것. 경계 없는 상상은 덤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상황에 있지만, 어딘지 조금씩 ‘갇혀’ 있는 모양새다. 땅에 심겨 나무가 된 친구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나무’), 하늘에서 내린 씨앗 비가 틔운 머리카락 때문에 외출을 못 하고(‘머리카락’), 환영이 주는 쾌락에 중독돼 방 안에 머물게 되는(‘가면’) 식이다. 정 작가는 이번 책 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단단한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어딘가에 갇혀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이야기들을 그렇게나 많이 썼는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갇힌 자들은 해방을 맞을까. 갇힌 생각은 어떻게 열리게 되는 걸까. 소설은, ‘나갔다’보다는 ‘나아간다’에 초점을 맞춘다. “숲 너머 지평선을 겹겹이 둘러싼 산”에 갇혀 살던 ‘나무’의 ‘그’가, 비극적 일들을 겪고, 악몽 같은 기억을 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나가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 10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것은 바로 그것이 주는 먹먹한 여운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이한 위안이다. 그것은 이제 정 작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데, 추천사를 쓴 정세랑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위로”다.

마지막에 실린 ‘완전한 행복’의 주인공은 용서할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선도 자비도 용서도 없는 세상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고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추악하고 끔찍한 세계에 대한 정보라 작가의 ‘무자비함’과 ‘단죄’도 오싹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안긴다. 정 작가는 “본의 아니게 복수 전문 작가가 된 것 같다”고 하지만, ‘저주 토끼’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집에서도 독자들은 변주되는 ‘복수’를 보게 된다. 맨 첫 장에 실린 ‘나무’에서부터 마지막 ‘완전한 행복’, 이어지는 작가의 말까지 이 책에서 뜨뜻미지근한 순간은 한 번도 없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그가, 지금의 러시아를 향해 남긴 말을 보라. “나쁜 놈들이 얼른 몽땅 죽어서 전부 늑대에게 뜯어 먹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정 작가는 주로 화가 났을 때 글을 쓰기 시작한다. 428쪽, 1만7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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