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때 지은 강화도 방어시설… ‘돈대’에 얽힌 조선 수난史[출판평론가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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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2-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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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평론가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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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공간은, 관광지가 되지 않는 한 잊히기 마련이다. 관광지가 되어 기억된다 해도 공간의 본래 의미는 퇴색한 경우가 많다. 치욕의 역사를 품은 남한산성은 온갖 식당들 틈에서 역사성을 잃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섰던 마지막 보루와도 같던 강화도 역시 관광객들의 잰걸음 속에서는 본래 자취를 더듬기 어렵다. 방어시설이었던 돈대(墩臺)가 대표적이다. 54개가 있었던 강화의 돈대는 10개가 멸실되었고,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고증 없이 복원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 이상엽의 ‘강화 돈대’(교유서가)는 돈대의 탄생 배경과 거기에 얽힌 수난의 역사를 선명한 사진과 함께 전하는 책이다.

강화도 돈대는 숙종 때 52개소가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후 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보장처’가 되면서 ‘돌로 만든 작은 성채’, 즉 돈대를 설치했다. 영조와 고종 때 하나씩 추가되면서 모두 54개소의 돈대가 강화도에 존재했었다. 원형을 간직한 돈대도 제법 있지만, 망양돈대처럼 ‘고증 없이 날림으로’ 복원된 것들도 적잖다. 외포리 항구와 석모대교 사이에 위치한 망양돈대 자리는 얼마 전까지 고압선 철탑이 들어서 있었다. 철탑을 옮기고 돈대를 복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었다. 어설프게 복원하면서 ‘주변에 대한 발굴이나 원형 복원의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화도 유일의 해수욕장인 동막해변에 있는 두 돈대는 명암이 교차한다. 분오리돈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유명한 관광지’라면, 송곶돈대는 접근하는 길조차 찾기 어렵다. 접근한다 해도 원형을 보긴 어렵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남은 흔적이라고는 허리 높이의 기단부만이 돈대임을 증명한다. 돈대 위치를 상세하게 기록한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지번 하나에 의지해’ 돈대를 찾아 헤맸는데, 가보면 대개 군부대 초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숙룡돈대, 소우돈대, 빙현돈대는 광복 후 제방을 쌓는 데 이용되면서 자취조차 남지 않았다.

대개의 돈대는 일제강점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일찍, 무려 영조 때부터 ‘폐쇄되어 용도가 사라진’ 돈대도 있다. 바로 양암돈대다. 그 터는 지금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기단석만 듬성듬성 남아 있다. 간척이 일찍 시작되었고 1707년 강화도 최대 간척지 선두포언이 완공되었다. 갯벌은 단단해졌고, 양암돈대는 자연스럽게 지리적 이점을 잃었다. 지금 양암돈대 터에는 속노랑고구마가 자란다. 돈대는 최근 아는 사람만 아는 ‘일몰 조망지’로 각광받고 있다. 인천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하면서 유적의 가치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라는 시공간에서의 ‘건축적 가치’와 탁월한 ‘경관’이 더해져 그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저자는 전쟁이 일상이던 공간 강화도에서 ‘모든 인간의 적대 행위와 전쟁의 긴장감을 평화로 전환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강화돈대’는 잊힌 존재 돈대를 주제 삼아 조선 후기부터 근대를 조망한 역사서라 해도 손색이 없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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