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도시?… 춘천은 ‘15분 슬세권’ 문화의 도시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춘천 ‘문화도시’ 사업의 일환인 ‘도시가 살롱’의 현판. 카페, 서점, 갤러리, 볼링장, 닭갈비집 등이 본래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까지 하는 프로젝트다. 춘천문화재단 제공

■ ‘도시가 살롱’ 프로젝트 호응… 문체부 선정 ‘올해의 최우수 문화도시’

거창하고 특별한 장소가 아닌
카페·서점·농가·막걸리 펍 등
생활속 친숙한 소규모 공간들
다양한 ‘도시가 살롱’에 동참

지난 3년간 94개의 공간에서
159개의 커뮤니티 활동 통해
1096번의 ‘만남’이 만들어져

읍·면에는 ‘ON-다’ 지원사업
‘1마을 - 1예술단체’ 연계 지원
10개 읍·면-10개 단체 활동중

춘천=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15분 도시’라는 도시정책 이론이 있다. 일, 주거, 공급, 의료, 교육, 문화 6가지 기능에 대한 접근이 15분을 넘지 않아야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것.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중 ‘문화’를 앞세운 ‘15분 슬세권(슬리퍼+역세권의 합성어)’을 지역 정책 키워드 중 하나로 삼았다. 슬리퍼 신고 편한 복장으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삶의 행복도가 올라간다는 의미다. 그것이 지역의 경쟁력이고, 지역 소멸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문화의 힘’은 어디까지,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문화도시’ 사업 추진 후 꾸준히 정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춘천시가 그 답이 아닐까. 지난달 28일 춘천을 다녀왔다. 이미 ‘15분 슬세권’을 이뤄내고, 문화 소외와 청년 인구 감소 문제까지 ‘문화’로 풀어나가고 있는, 문체부 선정 올해의 ‘최우수 문화도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역 내 예술가들과 시민들의 실험적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전환가게’의 풍경.

◇슬리퍼 신고 15분만 걸으면 카페, 서점, 갤러리 = 인구 28만의 이 소도시에는 눈 닿는 곳, 그리고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문화 지대’가 있다. 거창하고 특별한 장소가 아니다. 카페, 서점, 갤러리, 농가, 운동센터, 막걸리 펍, 게스트하우스, 볼링장, 닭갈비집, 중국집 등 생활 공간들이 ‘도시가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과 방문자들을 반긴다.

‘문화도시’ 사업 대상자로 선정된 후, 춘천은 코로나19라는 악재를 만났으나 ‘심리 방역’을 내걸고 ‘도시가 살롱’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도시 전체를 ‘살롱’, 즉 공동체 활동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인데, 단발성 금전적 지원이 아니라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꾸준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게 주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화양연화 커피’다. 코로나19 동안에도 지역민 문화 교류를 통해 손님을 확보해 팬데믹 터널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의 꿈이었던 DJ 음악다방을 차린 최대식 화양연화 커피 대표는 ‘도시가 살롱’의 지원으로 팝송영어교실을 운영했다. 이날 카페에서 만난 최 대표는 “카페도 살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얻었다”면서 “좋아하는 일을 공유하는 것만큼 큰 기쁨은 없다”고 전했다. 춘천문화재단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이 프로그램을 통해 94개 공간에서 159개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과 1096번의 ‘만남’이 이뤄졌다. 강승진 춘천문화도시센터장은 “살롱 주인장들과 함께 모색해 온 ‘커뮤니티 도시문화’가 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자부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도시가 살롱’을 포함해 춘천 지역 내 문화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경험한 인구는 6만1500여 명에 이른다. 전체 인구의 약 20%. 올해 축제 부분이 강화되면 10만 명, 즉 30% 이상이 지역 문화를 체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 센터장은 “참가자 만족도가 91.7점이나 되고, 정주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면에서 전망이 밝다”고 분석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도시활력 프로젝트 ‘춘천놀이’의 천변 요가 수업.

◇‘1마을 1예술단체’…“우리 도시에 ‘문화 소외’란 없지요” = 춘천은 대표적인 도농복합도시다. 도심과 농촌 지역 간의 문화 격차 문제가 늘 따라붙는다. ‘도시가 살롱’이 도심의 ‘15분 슬세권’ 성공 사례라고 한다면, 읍·면 단위 지역에는 ‘온다(ON-다)’라는 문화활동 지원 사업이 있다. 쉽게 말하면 ‘1마을-1예술단체’ 연계 사업. 현재 10개 읍·면이 10개 문화예술단체와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김유정 문학촌이 있는 신동면의 주민들은 지난 3월 3∼4일 양일간 김유정 소설가의 ‘봄봄’을 원작으로 한 연극 ‘유정할배의 봄·봄’을 올렸다. 신동면의 짝은 춘천에서 20여 년 활동한 극단 ‘도모’다. ‘도모’는 ‘아트팩토리’라는 소극장 겸 복합문화공간도 신동면 김유정 문학촌 내에 갖추고 있다. 연극에는 신동면 주민 10여 명이 출연했고, 150석이 매진됐다. 김미아 연출은 “토박이분들과 이사 온 지 10년째 된 분들, 그리고 엊그제 이사 오신 분들 모두 함께한 작업이었다”면서 “2월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연습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아트팩토리에서 만난 출연자인 마을 주민 길범수 씨는 “마을에 문화예술의 건강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했고, 또 다른 출연자 박인숙 씨는 “가족 간병의 힘든 일상 속 힐링의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온다’는 지역 예술단체들에는 재정적 지원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주로 농한기인 11∼3월에 진행되는데, 이때는 마침 예술단체들의 보릿고개다.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들은 쉬는 시기에 새로운 문화 체험을 할 수 있고, 공연 등 활동 비수기를 맞은 예술가들은 또 다른 일거리를 제공받는다. 모두가 ‘윈윈’하는 프로젝트. 현재 10개의 프로그램이 100회 진행됐고, 약 1600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공연예술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막’ 수료식.

◇로컬로 ‘턴’…청년을 돌아오게 하는 문화의 힘 = “새로운 도전이 삶에 설렘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80 평생 처음으로 참 재미있었습니다.”

봄, 낭만, 호수, 안개 등 춘천을 수식하는 오랜 낱말들이 있지만, 사람이 창조한 ‘문화매력’만큼 큰 힘이자 경쟁력은 없다. 그래서 춘천시는 ‘문화도시’ 에 대한 지역민들의 만족도를 꾸준히 조사하고, 문화를 만나고 달라진 삶에 대한 ‘간증’도 기록한다. 이때 아카이빙 사업이나 사업 개선을 위한 조사, 지역 관련 기록 등을 인력 양성 프로그램과 연계시키는 게 특징. ‘문화도시’를 표방하는 기타 지역에서도 참고하면 좋을 선순환 시스템이다. 강원대 앞에 자리한 카페 ‘소양하다’가 그 중심에 있다.

‘소양하다’는 춘천에서 만들어진 로컬창업단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고향으로 ‘턴’한 윤한(33) 대표가 운영 중이다. 카페의 특징은 ‘인생공방 기록장’이라는 공간이다. 지역민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돕는다. 윤 대표는 로컬 출판 에디터를 양성하는 ‘로컬 에-딛터’ 프로그램도 이끈다. ‘도시가 살롱’의 문화 소비자에서 이제는 공급 주체가 됐으니, 이 또한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다. 이 프로그램의 수료생들은 춘천시민 인터뷰집도 출간했다. 춘천 사람들의 ‘말’을 남기고, 여기에 청년 일자리 창출, 문화도시의 미래 일꾼까지 키워내니 ‘일석삼조’ 프로그램이다. 강 센터장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도시적인 것”이라면서 “문화도시 사업의 가장 큰 성과물은 결국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공연 예술 전문 인력을 키워내는 ‘아카데미 막’도 빼놓을 수 없다. 공연예술전문스태프협동조합과 협력해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춘천 거주 청년과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이 반반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춘천으로 아예 이주하기도 한다. 공연예술 분야에 종사하려는 청년층 수요가 지역 인구를 늘린 독특한 사례다. 현재 340명이 수료했고, 춘천 내 축제와 공연에서 스태프로 활동하거나, 관련 단체에 취업했다.

지난해 강원대에는 ‘문화도시학’이 수업으로 편성됐고, 이 과정 수료자가 문화도시센터에 채용되기도 했다. 강 센터장은 “중앙정부 지원이 끝나도 자력으로 문화도시를 이어가고, 세계문화도시를 향해 가려면 탄탄한 기초, 즉 풍부한 인력 양성이 관건이다”라고 전했다.

2019년부터 24곳 지정…지역 문화매력 발굴

■문체부 문화도시 사업은

‘문화도시’는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한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 문화창조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탄생했다. ‘문화도시’를 통해 K-컬처의 원형도 발굴하고, 지역 소멸도 막겠다는 의지다. 사업은 2019년 시작, 현재까지 24개 도시가 지정됐으며, ‘2023 올해의 문화도시’가 된 서귀포시를 비롯해 춘천시와 청주시, 완주군, 밀양시 등이 ‘최우수 도시’로 선정되는 등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문체부에 따르면, 지난해 ‘문화도시 사업’을 통해 18개 도시가 각기 15억 원을 지원받았다. 그 결과 지역 주민 250만 명이 문화를 향유했고, 약 3400개 문화 공간이 조성, 발굴, 활용됐다. ‘랜드마크형 문화거점시설’뿐만 아니라 ‘동네문화공간’까지, 도시별로 그 형태가 다양한 게 특징. 예컨대 춘천시는 구도심의 방치된 빈집과 빈 상가를 활용했고, 완주군은 경로당, 마을회관 등을 연계한 ‘별별마을회관’이 호응을 얻었다. 부산 영도구는 도시와 연결된 섬 문화 특성을 ‘한선잇기’ 브랜드 방식으로 구현해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에서 3관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올해는 24곳에 총 364억 원이 지원된다. 사업이 궤도에 오른 만큼 지역 주도로 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자력’ 키우기에 더욱 집중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