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나기 전 날도 무대서 노래… 세월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름[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3-04-10 09:05
  • 업데이트 2023-04-1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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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현미 ‘떠날 때는 말 없이’

‘앞으로 몇 년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의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보게 될까.’ 이렇게 애틋한 제목으로 꼬박꼬박 투병기(직장암 4기)를 연재하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가 4월의 보름달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라디오에선 잇달아 추모곡이 나온다. 제목(‘A Flower Is Not A Flower’)부터 해석이 구구한 연주곡도 있다. ‘꽃은 꽃이 아니다’ ‘어떤 꽃은 꽃이 아니다’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등. 꽃은 가만히 있는데 꽃밭 주변에서 소란을 떠는 모양새다. 잃어버린 성궤(예술의 뿌리)를 찾는 심정으로 노래채집가는 멀리 당나라로 떠날 채비를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무려 3800편의 시를 남겼다. 수많은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화비화’(花非花), 사카모토가 영감을 받은 바로 그 시다. 두 사람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 시인은 첫 줄에 꽃을 앉히고 다음 줄에 안개를 배치한 후 둘 다 부정해버린다. ‘꽃은 꽃이 아니고 안개는 안개가 아니다’(花非花 霧非霧). 뒤를 안 볼 재간이 없다. ‘한밤중에 왔다가 날이 새면 떠나간다’(夜半來 天明去). 이제 두 줄 남았으니 끝까지 마저 읽자. ‘올 때는 봄날 꿈처럼 잠시건만(來如春夢幾多時) 갈 때는 아침 구름처럼 자취 없이 사라지네’(去似朝雲不覓處).

이야기는 안개처럼 음악동네로 스며든다. ‘밤안개’의 가수 현미(1938∼2023)가 지난주 화요일(4월 4일) 별세했다.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졸업 후 모교에 국어 교사로 취직했는데 수업 중 대학가요제 얘길 잠깐 했다. “금상 받은 여대생 진짜 노래 잘하더라.” 수업이 끝난 후 중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사촌 누나 소개해드릴까요?” 누나의 이름은 노사연, 학생의 이름은 이영준. 방송사에서 마주치면 현미 씨는 늘 ‘우리 아들 국어 선생님’이라며 반겨주셨다. 나한테만 친절했던 건 아니다. 유명한 가수들은 대체로 신비감과 친근감 둘 중 하나를 갖는다. 전략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다. 현미는 확실히 후자 쪽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도 초대받았던 현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교실의 선두주자인 그가 단지 생계를 위해서 가수로서의 자존심을 버렸다고 보는 건 단견이다. 그의 노래교실은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도 가르치는 곳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차면 안 되듯이(안도현의 시) 남의 말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너는 누구랑 그렇게 뜨겁게 노래한 적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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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는 다르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생명이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선의를 전하자.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김소월 시 ‘초혼’). 오늘은 현미의 ‘떠날 때는 말 없이’로 마감하자.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 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 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 인연이건 운명이건 시작은 ‘그날 그 자리 그 사람’이다. 똑같았던 마음이 어느 순간 달라지고 그 둘은 갈라선다. 이 노래는 인간관계의 성찰과 교훈을 담고 있다. 떠날 때 말 많이 하지 마라. 떠난 후에도 말 많이 하지 마라. 영원한 것은 없으니 달빛 비칠 때(삶의 축제 기간에) 그 빛에 젖어 들어라. 그리고 갈 때는 말 없이 가라.

백거이도 가고 김소월도 가고 사카모토도 가고 현미도 갔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세상을 떠난 것일까. 세상에서는 몰라도 세월 속에서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조지훈 시 ‘낙화’). 그러나 봄바람 불어오면 술이 익듯이(그 술의 이름은 예술) 여기저기서 꽃 필 것이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현미 ‘보고 싶은 얼굴’) 우리는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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