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꽃바람이 분다

  • 문화일보
  • 입력 2023-04-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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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숙 수필가, 괴산 농부

내 손길 기다리는 텃밭정원은
평생직장이고 변치 않는 친구

정원도 함께 사는 사람 닮아
가족의 스토리 고스란히 담아

아이도 나무도 가족도 가지 뻗고
나이테 키울 것이다…참 좋다!


꽃비가 내린다. 강둑길을 따라 하얗게 벚꽃 천사들이 퐁퐁 터지고 강 건너 산비탈에는 진달래가 분홍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어찌 된 일인지 산허리마다 산벚꽃까지 같이 터졌다. 기후가 변해서일까. 예전에는 가로수 벚꽃이 지고 나면 산자락에 산벚꽃이 시차를 두고 피어났었다. 연분홍 산벚과 물오른 연둣빛 새싹들이 어우러진 봄 산은 어디든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취할 만큼 아름다웠다. 꽃길 따라 연인들의 연출 사진도 볼 만하고 그 모습이 샘나서 따라 해 보는 온 가족이 산보를 나온 집도 보기 좋고, 귀여운 강아지와 꽃구경 나온 사람들도 따뜻한 표정이 모두 다 꽃보다 아름답다.

엄마, 우리도 꽃구경 갈까? 전화기 너머 큰아들 목소리가 들떠 있다. 그럴까 언제?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하이 소프라노. 너무 반가워 지금 올 거냐고 다그치듯 되묻는다.

‘봄날은 간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일 정원에서 검불 걷어내고 꽃모종 옮겨심고 퇴비 주고 물 주다 보니 하루해가 짧다. 채마밭에 가 보니 저 혼자 씨 뿌리고 자란 명이나물 기특해서 칭찬해 주고 몇 이파리 땄다. 무한대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전호 나물은 이미 온 밭을 넘어 밭둑으로 씨를 뿌려서 통제 불능이다. 저 살아갈 공간도 확보 않고 빡빡하게 뻗어 나간 부지깽이나물은 경쟁이 심했는지 일찍 나와서 지난번 된서리에 속잎이 얼어 죽었다. 한동안 초여름 날씨를 기록하더니 하루는 영하로 떨어져서 난리가 났다. 날씨가 들쭉날쭉하니 식물도 정신을 못 차린다. 안타깝지만 얼어 죽은 새순은 빨리 따 줘야 옆에서 새순을 올리지. 성질 급한 부지깽이나물은 오늘 저녁 비빔밥 재료로 당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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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 들나물만 나물이 아니다. 꽃나물도 명품 나물이다. 황매화 꽃밭에 원추리가 융단을 깔았다. 가끔 오일장에 나가면 할머니 나물 바구니에 꼭 들어 있는 원추리를 올해는 내 밭에서 먹어 보리라. 튼실한 놈으로 골라 한 바구니 뜯었다. 초롱꽃 나물도 먹어 보자고 마당까지 내려온 것들을 골라 뜯었다. 귀농 초기에는 참하게 생긴 초롱꽃 나물이 단골 메뉴였다. 어느 해이던가, 나물 박사님이 집에 들렀을 때 물어보니 섬초롱은 나물로도 훌륭한데 데쳐서 물에 담가 독을 좀 빼서 먹으면 더 좋다고 하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동안 남편에게 계속 그냥 먹였는데 어쩌냐고 했더니, 이렇게 잘 살아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이 선생(남편)이 더 튼튼해졌을 거라며 웃으신다. 몇 년을 나물로 먹고도 더 건강해졌으니 섬초롱 나물은 독이 없는 걸로 인정한다.

집으로 들어서는 출입구 모퉁이에 있던 삼잎국화는 오늘은 캐서 옮겨야 할 판이다. 이미 길을 침범했고 커다란 키 때문에 해마다 쓰러져서 기둥에 붙잡아 매 놔도 감당하기 어렵다. 삼잎국화 세 번은 잘라먹어야 꽃이 안 쓰러진다고 동네 할머니께 배웠다. 어르신들 툭 던지는 한마디가 생활의 지혜다. 가느댕댕한(가늘가늘한) 몸매에 함박꽃만큼이나 크게 꽃이 피니 균형이 안 맞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나물을 실컷 해 드시고 꽃을 본 모양이다. 장독대에 있던 꽃을 화단으로 옮긴 게 실수였다. 장독대 옆에서 피어나 혼자 보기에는 아까워서 입구로 옮겼더니 이렇게 무질서하게 드러누우며 꽃을 피울 줄 몰랐다. 명자꽃 옆으로 옮겨서 기둥 삼아 묶어 줘야 하나 고민이다. 삼잎국화도 뜯어보니 한 바가지다.

명이나물은 생으로 채 썰고, 부지깽이나물·원추리·섬초롱·삼잎국화는 데쳐서 물에 담갔다. 채반에 물을 빼려고 종류별로 얹어 놓으니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돌아가신 엄마를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한다. 엄마가 화덕에 걸린 솥단지에서 봄나물을 데쳐 커다란 싸리 채반 위에 건져내면 봄 향기가 폴폴 날아왔었다. 마당 가득했던 산나물 향기는 그렇게 통째로 내 가슴에 저장되었다. 엄마의 눈부시게 하얀 옥양목 앞치마가 생각난다. 마당에서 거창하게 엄마 흉내를 낼 수는 없지만, 울 엄마 쓰시던 채반에서 엄마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봄날이다. 내가 평생 쓰고 아들 며느리가 쓰다가 이어서 손녀딸이 내려받기를 바란다.

오늘 저녁은 초록 풀밭이다. 마당에서 나온 나물과 농사지은 우렁이 쌀로 밥을 지어 온전히 자급자족 저녁 밥상을 차린다. 이런 날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제 방앗간에서 짜온 꼬스운(고소한) 들기름 한 방울이 비빔밥에 화룡점정을 해 준다.

일어나면 일이고 돌아서면 풀밭이지만, 언제나 나를 불러주고 내 손길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텃밭 정원은 평생직장이고 평생 변치 않는 친구다. 며칠 전 이웃사촌으로부터 보는 즐거움은 물론 껍질과 나무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는 마가목을 선물로 받았다. 주말에 할미랑 벚꽃 보러 와준 손녀딸을 위해 정원 한쪽에 하얀 꽃이 고급지고 단풍과 열매까지도 꽃송이처럼 아름다운 그 마가목을 기념식수했다. 예전에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시집가는 딸에게 반듯하고 가벼운 장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속성수를 심은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함께 커 가는 친구 나무가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원은 함께 사는 사람을 닮아 가고 한 가족의 스토리를 담는다. 그늘 한 점 없던 네모난 밭에 터를 잡고 이 집을 짓고 동네 형님이 심어준 소나무가 이제는 지붕을 넘어서서 해 질 녘 노을과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이다. 우리 부부를 닮은 느티나무가 대문간에 서 있고, 그 옆으로 손녀딸 닮은 나무까지 심었으니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날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도 나무도 우리 가족도 아름드리나무처럼 가지를 뻗고 나이테를 키울 것이다. 참 좋다! 이 봄 텃밭 정원 놀이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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